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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남긴 과제
월드컵이 남긴 과제
  • 이종오 계명대
  • 승인 2002.07.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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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

이종오 계명대·사회학

6월 26일 한-독전을 고비로 전국을 달군 월드컵의 열기가 진정되며 한국사회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월드컵은 한시적인 초대형 이벤트로서 어느 사회가 월드컵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사회로 변모한 역사적 사례도 없고 한국사회 역시 그러한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월드컵이 한국사회에 미친 충격이 워낙 크기 때문에 이것은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월드컵의 성과와 결과로 꼽아지는 것은 ‘국가이미지 제고’로 인한 직·간접적 경제효과와 축구행사 자체에서 한국팀이 거둔 ‘믿기 어려운 성과’,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붉은악마’로 대표되는 열광적 응원과 이것이 미친 사회문화적 영향이다.

월드컵 기간에 한국사회를 휩쓴 사회문화적 분위기는 태극기와 아리랑으로 나타나는 배타적이지 않은 ‘신민족주의적 정서’와 자연발생적인 ‘청소년문화’가 결합된 것이었다. 붉은 색으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역동성과 자유분방함에 기성세대가 가세한 것이 전사회적 단결과 연대라는 덕목으로 나타났다.

근대 이래 대중이 가두와 광장에 군집한 사례는 많았으나 이는 예외없이 정치적 저항운동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이번 월드컵 열기는 근대이래 최초로 비정치적, 사회문화적 축제에 전 사회가 참여한 사건으로서 독특한 문화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정확하게 월드컵의 한가운데에 치러진 지방선거가 사상최저의 투표율로서 국민적 관심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는 한국인의 관심이 재래의 정치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감각적 삶과 현세적 즐거움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현재의 이런 감각주의와 현세주의는 상당한 건강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식민지 시대 이래의 허무와 절망 속의 퇴폐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는 한국의 정치와 사회운동의 향후 담론이 민주주의, 민족, 민중을 거론할 때에 추상적 역사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현세적 삶과 분명히 접목돼야 함을 가리킨다.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등의 밝고 즐거운 색깔이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색깔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월드컵 기간의 시민적 ‘문화운동’은 한국인의 삶과 의식의 기준에 대변화를 상징하는 ‘문화혁명’적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지극히 ‘퇴영적’ 사건으로 보이는 6·14 지방선거의 결과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는 수구파에 대한 인정이라기 보다 진보와 개혁세력에게 자기 변신을 촉구하는 대중의 메시지로 봐야 한다. 더 이상 일상적 삶의 즐거움과 결부되지 않은 퇴색한 역사적 당위의 반복이 대중을 동원하지 못한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퇴영적 정치세력의 대약진 앞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오히려 과거의 정치판과 정치구도가 전면적으로 바뀌는 계기로 볼 수 있다. 2002년 3, 4월의 ‘노풍’은 이런 변화의 조짐이었고 계기였다. 6·14 선거는 이런 흐름을 타지 못하는 세력에 대한 가차없는 경고였다. 월드컵의 함성은 이에 대한 다시 한번의 촉구이며 이제 월드컵 이후 한국의 진보와 개혁세력를 포함한 시민사회는 이에 적절히 답해야 한다.

이는 비단 퇴색한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뿐 아니라 한국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즐거움, 발랄함, 자유로움에 기반한 새로운 질서를 촉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002년의 ‘6월 세대’는 근대이래 최초로 역사적 패배의식과 민족적 열등의식을 극복한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최초의 근대적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한국의 강의실에서 영어가 原語로 지칭되는 시점에서 나타난 것이어서 참으로 경이롭다. 한국인은 이제 진정으로 자기 연민과 자기 부정에서 벗어나는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는 과연 혁명적 사건이다.

물론 월드컵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와 새로움이 모두 좌절될 때 한국사회는 더 깊은 좌절과 자기 연민의 수렁 속으로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역사의 퇴영을 방지하기 위해서 특히 한국의 지식인은 대중이 창조해낸 역사의 새흐름을 정밀한 언어로 구체화해 시대의 나침반을 만들어야 한다.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어낸 그라운드의 전사들은 대개가 사회적 기층 출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민족의 자부심을 지켜낸 사람들이란 대개 이 사회와 국가로부터 혜택받은 집단에서 나오기보다는 이 사회와 국가로부터 별로 받은 것이 없는 층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한다.

나라를 지키고, 산업을 일궈내고, 국민에게 즐거움과 자부심을 선사한 우리의 이름 없고, 별볼일 없고, 그저 그런 이웃들을 뜨겁게 껴안고 하나됨을 확인하는 6월은 복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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