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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의 아침을 열며
‘10%’의 아침을 열며
  • 채호준 전남대・생명과학기술학부
  • 승인 2012.01.0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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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구실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연구실이란 일회용 플라스틱 튜브와 자동피펫이 굴러다니는 실험대, 그리고 원심분리기, PCR(유전자증폭기) 등의 실험장비와 여러 대의 냉동고가 꽉 들어차 있는 실험실을 의미한다. 생명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이런 실험실에서 하루의 반 이상을 지내며 나 또한 그런 부류에 속한다.

실험실에 나가기 시작한지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고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만 한 가지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침에 눈을 뜨면 실험실에 나가고, 시간이 늦어 더 이상 일을 못할 정도 피곤해지면 실험실을 나서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실험실은 연구를 하는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이며, 힘들고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어머니의 품 속과 같은 공간이다.     

순수과학 분야 연구의 경우 처음 생각했던 실험이 성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마도 내  분야 연구의 경우 10% 미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실험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실험의 90% 이상은 실패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많은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또 어떤 실험은 실패를 반복하면서 얻은 결과를 토대로, 조건을 수정하고 재도전하여 결국 문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보통 몇 년이 걸리는 이 지루한 과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엉뚱하다고 해도 좋을 황당한 상상력, 그러한 상상을 실험으로 옮길 수 있는 자유로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는 열정이 필수적일 것이다.

상상력과 자유로움이 보장된다는 것은 효율적이라는 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즉 효율적으로 많은 논문을 발표하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체제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의 원리를 찾기 위해 시행착오는 필수적이며 때로는 새로운 원리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다른 과학자들을 평가하며 또 다른 과학자들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peer review’라고 부르는 이런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독창성을 최우선으로 평가한다. 독창성이 결여된 채 화려한 결과로 포장된 논문들은 과학자들의 눈에는 몇 장의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어떤 논문을 쓰면 좋겠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나는 ‘읽는 사람들이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하게 되는 논문을 써야지’라는 대답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독창적인 일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자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연구의 경우 동료 연구자들 까지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따라서 학문, 특히 순수과학 분야의 업적 평가는 평가기준이 다양해야 함은 물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몇 년의 업적 ‘impact factor’ 등의 단순 잣대로 일괄 평가를 하는 우리의 대학사회에서는 교과서에 실리거나 오랜 기간을 두고 수천 번씩 인용될 논문을 발표할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원생들은 연구의 꽃’

대학평가에서 취업률은 중요한 평가지표이다. 2년여 전부터 건강보험 가입자 수를 기준으로 취업률을 계산하게 되자 대학원생은 취업률을 떨어뜨리는 존재가 됐다. 내가 전공하는 분야의 경우 학부 졸업생이 전공을 살려 취업할 곳은 거의 없다. 적어도 석사 이상 훈련이 돼야 전공분야의 취업이 가능하다. 석사학위 소지자의 경우 거의 모두 취업이 가능하다는 것 또한 내가 전공하는 분야의 특색이기도 하다.

실험실에서 “대학원생이 해내지 못하는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농담을 많이 한다. 대학원생들이 가장 열정적이고 창조적이며, 미래 우리사회의 일꾼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대학원생들은 ‘연구 분야의 꽃’이므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대학원생들에게 일반 취업자보다 더 높은 대우를 해주어도 우리 사회가 잃을 것은 없다. 그들이 장차 우리 사회를 이끌고 먹여 살릴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나와 같이 일하는 모든 학생들이 즐겁고 자유롭게 실험하며 편히 쉴 수 있는 실험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황당한 상상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시도가 난무하는, 하지만 실패를 딛고 꾸준히 전진하는 그런 실험실이 되기를 원한다.

오늘이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한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른 시간에 실험실에 나와 실험을 시작했고, 실험을 하고 논문을 읽으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또 대부분의 실험은 실패를 할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읽고 생각하다보면 오늘 하루도 저물 것이다. 그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또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 위해 실험실에 나올 것이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새록새록 신비해지는 생명현상의 새로운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채호준 전남대・생명과학기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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