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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없는 인문학의 현실
사유 없는 인문학의 현실
  • 이택광 서평위원(경희대)
  • 승인 2012.01.02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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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이택광 서평위원

한때 두꺼운 철학서를 끼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던 나라에서 이제 철학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익숙한 논법으로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탓’이라고 말해버리면 될 일이지만, 세상일에 대한 분석은 무엇을 탓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외부적으로 본다면, 철학이나 인문학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장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확실히 인문학은 각광 받고 있는 분야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장성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는 교양이라는 도구적 접근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몰고 온 인문학 시장의 열풍을 두고 오간 설왕설래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이것이다. 사실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을 원했다면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정의의 이름으로 소비하는 상황은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흔한 일이지만, 이렇게 특정한 책은 내용과 상관없이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와 안철수, 그리고 ‘나는 꼼수다’까지 이어지는 이런 현상들은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하게 연결점들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징적 연결점들은 공통적인 문제의식들을 표출한다. 정치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공통적인 것을 묶어내면 일종의 인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인기가 바로 교양을 구성하는 원동력이다. 인기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정념이라고 한다면, 교양은 이 정념을 하나의 지식체계로 만들어서 공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념이라는 불평등한 특이성을 교양이라는 공리주의적인 분배기계로 둔갑시키는 것이 이를테면, 요즘 시장에서 각광 받는 인문학의 실체이다.

결국 인문학을 교양으로 만드는 것이 인기의 비결인 셈인데, 이를 통해서 달성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앎의 평등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인문학의 교양화에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저항했던 인물이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아니었나 싶다. 그에게 철학은 무엇보다도 사유의 문제였고, 이 사유는 곧 삶이었던 것이다. ‘피를 가지고 쓰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본성이었고, 이런 까닭에 철학은 평등을 가장한 공리주의의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었다.

물론 니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는 대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버거운 일이다. 니체처럼 살아가는 것은 이제 인문학자에게 적절한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뿐더러, 가령 존재론적 기획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게 훌륭한 전망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최근 저서가 바로 맬컴 불이 쓴 ??안티 니체??가 아닐까 싶다. 영국의 철학자인 불의 논의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니체를 따를 경우 봉착하는 철학자와 대중의 구분이다.

프랑스철학에 따라붙는 질긴 비판을 연상시키는 이런 논의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결국 철학이라는 것도 일정한 제도적 훈련을 거쳐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프랑스철학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 입시 제도야말로 프랑스적인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넘어가는 자’라는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니체가 내세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삶에 대한 부정이다. 현재를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는 기본적인 구조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초월의 의지가 현재에 대한 비판을 만들어내는 예각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이 구도가 그대로 한국 사회에 들어왔을 때 조금 다르게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현재의 극복 문제가 근대화라는 실천적인 기획으로 내려앉을 경우, 한국의 오늘은 미래의 선진국 또는 정상국가를 위해 끊임없이 부정되어야한다. 이 상황이야말로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형이상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아닐까? ‘넘어가는 자’가 미국에 가서 슈퍼히어로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한국에서 이 존재는 ‘선진국 시민’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구도는 초월적이지만, 궁극적으로 넘어가는 행위는 세속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다. 인문학이 인기라지만, 정작 그것이 요구하는 사유를 귀찮아하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까닭도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 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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