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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구조조정'이란 狂風이 지나가면
'학문구조조정'이란 狂風이 지나가면
  •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12.01.0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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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허남결 동국대 교수
지금 대학가에는 ‘학문구조조정’이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아니 ‘학문구조조정과 학과통폐합’이라는 지진해일이 대학의 본질마저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형국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는 수년 전부터 ‘학제간 연구와 학문의 융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이러한 작업을  추진해 오다가 얼마 전 드디어 ‘미래지향적 학문구조개편안’이라는 것을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것이 실로 보잘 것이 없어 긴 한숨과 함께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내용인즉슨 그동안 학부제에서 세부전공으로 나뉘어져 있던 몇 개 전공을 다시 하나로 통폐합하거나 일부 유사한(?) 학문영역을 새롭게 학부제로 묶은 것, 그리고 필자가 속한 철학윤리문화학부의 윤리문화학전공을 완전 폐지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고작 이런 정도의 이른바 ‘혁신과 개혁’을 위해 지난 5년간 대학안팎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동안 학교당국은 입학성적, 재학율, 취업률 등과 같은 학과평가 기준을 통해 같은 대학 안에서 학과간 줄 세우기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교수와 학생 및 직원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실수를 되풀이했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대학의 발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야말로 ‘일 벌이기’의 심각한 후유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대학은 ‘있는 그대로 놔두고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경영방침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한심한(?)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너무나 험악한(?) 시대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그렇게 발언할 엄두조차 낼 수 없다.

필자가 공부하는 분야는 윤리학이다. 개인적으로는 윤리의 순수 이론적 탐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적용 가능한 단순 소박한 행위원리를 제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럽게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만나게 됐고, 요즘에는 불교윤리의 自利利他行을 현대사회의 다양한 윤리쟁점들을 해결하는 원리로 거듭나도록 가다듬기 위해 이런 저런 학문적 시도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일종의 퓨전윤리를 고민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 때문에 학술세미나 등에서 발표하는 필자의 논문은 상반된 평가를 받기 일쑤다. 한편에서는 신선하고 도발적인 관점이 흥미롭다고 칭찬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윤리학의 근본적 의미를 무시한, 말하자면 경박하고 위험천만한(?) 윤리를 제안하고 있다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예컨대, 필자가 제안한 바 있는 ‘자리(우선)이타행’의 행위원리가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필자가 보기에 불교윤리의 ‘자리이타행’ 개념은 서양윤리학에서 말하는 이기주의를 전제한 공리주의의 정식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대인들의 자기중심적 생활태도를 긍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윤리적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를 ‘자리(우선)이타행’이라고 명명해 보았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자기 자신의 이로움을 무시하거나 남의 이로움을 빼앗으려고 하는 도덕적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나 자신의 이로움을 제대로 추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와 남의 참된 이로움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나 자신의 이익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자기인식이야말로 남을 배려하고 도울 수 있는 윤리적 삶의 전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 ‘완전한 이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종교적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줌과 동시에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이기주의자’라는 비난으로부터도 벗어나 최근 유행하는 말로 ‘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간략한 윤리적 사고방식이 어쩌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평범한 일상적 행위원리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발칙한 상상을 자주 해본다. 이 때문에 학자로서 더러 욕을 먹기도 한다. 그래도 필자는 이런 방식의 윤리학 성역 허물기와 응용가능성의 모색이 재미있고 또한 유익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동국대의 ‘미래지향적 학문구조개편안’에 의해 윤리문화학전공이라는 소속 학과가 없어짐으로써 이런 학문적 도전도 마음 놓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해당 학과의 교수로서 겪는 인간적 자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것도 모든 것이 무상하게 느껴지기 마련인 歲暮에 일어난 일인지라 더욱 씁쓸하기만 하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언젠가 이 ‘학문구조조정’이란 광풍이 지나가고 윤리문화학이 다시 인문학의 새로운 접근방법으로 각광 받을 그 날이 오기를 말이다. 추운 겨울이 가면 따뜻한 봄날이 오지 않던가!

허남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동국대에서 박사를 했다. 동국대 교수회 회장을 지냈다.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 「업과 윤회 사상의 일상적 수용 태도」 등 다수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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