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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꿈의 원천은 '보리수' 나무 아래 그 샘물
위대한 꿈의 원천은 '보리수' 나무 아래 그 샘물
  •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2.01.0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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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시선_ 스티브 잡스의 사과와 예술적 상상력

철학자 김상환 서울대 교수. 그에게는 언제나 '사유하는'이 수식어처럼 붙는다. 사유하지 않는 철학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김 교수에겐 그게 좀 더 특별하다. 그는 계간 <철학과현실>에 '철학자의 노트'를 연재하고 있다. 과거 <출판저널>에 책을 화두로 사유를 풀어냈던 글을 기억한다면, '철학자의 노트' 역시 지적 흥미와 사유의 밀도가 촘촘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이번 <철학과현실>91호(2011년 겨울호)에 발표한 「스티브 잡스의 사과와 예술적 상상력」은 IT기술과 인문적 상상력을 결합한 글이라, 시의성 있게 읽힌다. 그의 글을 발췌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의 이름을 애플로 정했다. 누군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그것이 스마트 시대를 열어젖힌 애플사의 로고다. 이 로고는 가까이는 뉴턴의 사과를, 멀리는 창세기 신화의 善惡果를 비스듬히 가리키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그린 사과, 누군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도 역시 인간이 언젠가 삼켜버린 신적인 상상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뉴턴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잡스가 이룬 위대한 성취 또한 IT기술과 인문적 상상력을 결합하는 데 있었다. 이 시대의 천재 잡스는 인간을 하느님처럼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 안에 숨어 있는 신적인 상상력을 부각하기 위해 사과 모양의 로고를 만든 것이 아닐까.

서양사상사에서 상상력을 예찬한 것은 무엇보다 노발리스나 콜리지 같은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상상력을 단순히 심리적 능력의 일종으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존재-신학적 원리로 끌어올렸다. 철학 쪽에서 그런 낭만주의적 흐름에 동참했던 셸링에 따르면, 상상은 '절대자의 삶' 자체다. 이때 절대자란 끊임없이 사물을 낳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자 지속적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신과 같다. 칸트에게 상상력은 판단의 주관적 가능조건에 불과하나 셸링에게는 사물이 분화되고 개체화되는 과정 자체가 상상이라 불린다. 세계에 질서를 가져오는 개체화는 신의 이성에 내재하는 이념들이 객체화되는 과정이고, 그런 객체화는 예술적 상상과 다르지 않다. 상상은 인간이나 예술가의 상상이기에 앞서 자연의 상상이자 신의 상상이다.

스티브 잡스의 위대성은 물질과 상상력,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다시 그리는 선봉에 서서 현대적 삶의 무늬(인문)를 새롭게 변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근대성 전체가 걸린 역사적 징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술과 예술을 나누는 경계선은 근대적 인문의 형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갈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근대 문화에서 예술은 인공의 코드로 번역, 왜곡되기 이전의 순수에 대한 열망을 대변한다. 그것은 실낙원 이전, 인간과 자연이 하나였던 처녀의 시간에 대한 열망과 같다. 칸트에서 낭만주의에 이르는 시기의 예술을 규정하는 최후의 충동은 기원에 대한 열망, 대지에 대한 향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과 인공의 경계, 따라서 예술과 기술의 경계는 다르게 그려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현대의 인문은 대지의 시대를 지나 우주(cosmos)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때 우주의 시대란 삶의 모든 절차가 기술과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개되는 시대를 말한다.

테크놀로지가 공기나 물 등과 더불어 세계의 원소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 이런 우주의 시대에 예술과 기술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예술적 창조자는 예술가이기에 앞서 기술적 장인이 돼야 한다. 대지의 시대를 이끌던 주인공이 예술가라면, 우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주인공은 차라리 장인이다. 따라서 근대 미학에서 그토록 중요하던 예술과 공예, 작품과 제품 등을 대립시키던 경계선은 명료성을 잃어버리고 복잡하게 얽혀버린다. 스티브 잡스는 인류가 맞이한 이런 우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예술이 기술이 되고 기술이 예술이 되는 시대를 앞당긴 천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천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순수 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예술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대지의 시대에 선악과를 탐하던 것이 예술가였고 우주의 시대에는 장인이라면, 이 시대의 장인은 무엇보다 예술가가 심어놓은 보리수 아래에서만 어떤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장인은 가곡 「보리수」의 주인공과 같은 위치에 있다.  "성문 앞 샘물 곁에/서있는 보리수 // 나는 그 그늘 아래/단 꿈을 꾸었네 // 기쁠 때나 슬플 때나/찾아온 나무 밑"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장소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사유, 특히 창조적인 상상은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상상은 특정한 위상학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 일어난다. 특히 인간의 자기관계를 기본적인 축으로 하는 인문적 사유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기 위해 자기 자신보다 더 친근한 어떤 장소에 자리해야 한다.

인문적 사유의 특징이 直志向(intentio recta)의 주객관계를 주체의 자기관계를 통해 굴절시키는 斜志向(intentio obliqua)에 있다면, 위의 가곡 또한 그런 사지향의 사유가 움트는 독특한 장소에 대한 노래에 해당한다. 여기서 그런 특권적인 장소는 성문 바깥에 서있는 보리수의 그늘에 있다. 화자인 ‘나’는 오로지 그 보리수 아래에서만 기쁨을 기쁨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경험할 수 있다. 물론 화자는 성문 안에서도 희노애락에 휩싸여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우연한 정념들을 자신의 고유한 역사성 안에서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경험하고 향유하는 것은 오로지 성문 바깥의 보리수 밑에서 뿐이다. ‘나’는 단지 그 나무의 그늘 속에서만 꿈을 꿀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가 꿈을 꿀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갈 보리수는? 스티브 잡스는 그것이 예술적 상상력에 있음을 강조했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있는 보리수.' 이 구절에서 보리수가 예술이라면, 그 보리수에 물을 대는 샘물은 예술적 상상력이다.

예술의 나무 아래에서 칸트는 도덕적 반성에 빠져들지만, 셸링은 철학적 반성에 빠져든다. 적어도 1800년에 완성되는 셸링의 초기 주체철학(초월적 관념론)에서는 예술이라는 나무 밑이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철학적 주체가 자신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와 도구, 그리고 방법마저 그 나무 밑에서 구해야 한다. 철학이 하는 일은 예술이 도달했던 높이를 따라잡는 데 있다. 철학은 역사적으로 예술의 품안에서 태어났고 다시 예술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학문의 유년기에 포에지로부터 태어나 양육된 철학과 철학을 통해 완전함에 접근한 모든 학문들은 완성 이후, 마치 개별 하천들처럼 그들이 떠났던 일반적인 포에지의 바다로 다시 흘러든다.”

그래서인가. 1801년부터 개진되는 셸링의 동일성 철학(절대 관념론)에서는 예술적 상상력은 더 이상 예술가에게만 고유한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말한 것처럼 존재자의 개체화 과정 자체로 일반화된다. 셸링의 주체철학에서 예술적 상상력(미적 직관)은 주체(이성)가 자신의 근원적인 자기의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지해야 하는 유일한 기관이자 자료이되, 주체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반면 동일성 철학에서 예술적 상상력은 (절대적) 주체의 삶 자체로서 내면화된다. 예술적 상상력은 절대자의 자기 긍정이자 현시며 절대적 주체(신)의 자기 객체화 과정 자체다. 셸링의 동일성 철학은 자연의 활동 전체를 예술적 활동으로 간주하는 예술가-형이상학이고, 여기서 예술작품의 구조는 자연 일반의 존재론적 구조로 확대?심화된다.

이런 예술가-형이상학은 이후 니체에서 다시 나타난다. 들뢰즈 같은 철학자만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 같은 장인도 이런 사상사의 계보 안에서 평가돼야 한다. 서양사상사에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예술이라는 보리수를 찾은 인물들, 그 보리수 아래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만날 뿐만 아니라 바로 거기서 신적인 진리를 얻고자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테크놀로지 시대에도 역시 예술적 상상력이 솟아나는 샘물 곁에서만 위대한 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걸출한 증인이다.

김상환 서울대·철학과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 연세대 문리대 교수,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소장 역임.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 철학 박사. 저서로는『해체론 시대의 철학』,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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