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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인, 좀더 비판적인 시선을 위하여
비판적인, 좀더 비판적인 시선을 위하여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2.2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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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계간지 리뷰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가능할까.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왜 한밤중에 산사태가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사회과학자들이 말할 수 있을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급사로 한반도 정세가 시계제로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계간지와 이를 꾸려나가는 지성들이 자기 시대의 무거운 과제와 대면할 때, 거기에는 역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역사에 대한 전망이 투명한 의식으로 전제되기 마련. 예측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겨울 계간지 가운데 <역사비평>97호를 맨 앞에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특집 「'남북기본합의서 20주년' 탈냉전과 한반도」를 꾸렸다.

그렇다면 최근 북한의 중대변수를 포함, 기본적으로 남북기본합의서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성될 한반도 긴장 문제를 풀어볼 수 있다는 독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비평>측은 "합의가 가능했던 주객관적 조건, 합의의 의미와 한계를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라고 말한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냉전체제의 종식」(김남섭), 「김일성의 남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이정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김연철), 「남북기본합의서와 6·15남북공동선언」(임동원)까지 주요 흐름을 짚었다.

<역사비평>이 마련한 의미있는 기획은 「'신해혁명 100주년에 묻는다'-중국의 향배」다. 도대체 거대한 땅덩이 중국에서 신해혁명 이후 어떤 역사가 진행됐는가. 편집진은 "그간 우리의 중국론, 동아시아론이 너무 자기중심적이 아니었던가 반성하면서 기획의 초점을 중국인의 자기 이해와 평가에 두었다"라고 접근 방향을 설명한다. 「100년 동안의 급진에서 벗어나다」(원톄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성근제), 「중국의 미래, 중국이라는 미래」(이정훈) 등의 글을 실었다.

2011년 우리사회를 달군 논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복지논쟁'이다. <진보평론> 50호가 이 문제를 특집으로 내걸었다. 「복지논쟁, 좌선회를 기획하다」를 마련한 <진보평론>은 '복지의 실현, 민주적 통제와 체제전환의 상상력 결합'을 주문하고 있다. "이번호에 실린 글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환기하고 있는 것은 복지에 관한 논쟁구도가 왜곡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논의의 지형을 왼쪽으로 이동시켜 생산적인 복지논쟁의 계기를 마련"하려 했다고 밝힌다. 「한국 복지국가 논쟁에 관한 소고-복지정치의 진보성,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주은선),「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한 복지논쟁의 주요 쟁점들」(홍헌호),「복지의 색깔은 무엇인가?」(제갈현숙),「한국 사회 대안담론으로서의 '녹색복지'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정필) 등이 논쟁적으로 배치돼 있다. 홍헌호의 글은 복지에 대한 보수적 담론을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그들'의 논리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요컨대 그는 교육·보건·복지 부문의 투자가 경제성장에 더 크게 기여했음을 증명한다. 그의 글은 "복지는 자본주의 국가를 중립적으로 보이게 하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제갈현숙의 글과 날카롭게 대립할 수 있다.

MB정부 내내 일관된 '공약'은 경제살리기였다. 747 플랜은 왜소하게 변경되고 말았지만, 경제를 보고 그에게 표를 건넨 층들은 지금 피로감이 아니라 위기감에 빠져있다. <황해문화> 73호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살리기」를 특집으로 잡은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리라. "7퍼센트 성장의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일은 이제 무의미하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된 수단의 내용과 결과를 봐야 한다. 지금의 우리 생활은 4년 전에 비해 얼마나 더 즐겁고 행복한가?"라고 편집위원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묻고 있다.「이명박 정부의 경제 살리기와 민생」(조원희),「성장의 시녀로 전락한 복지」(조흥식), 「토건국가의 시장만능주의 부동산 정책」(전강수), 「이명박 정부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정책의 딜레마」(홍장표), 「금융규제완화 가계부채: 경과와 해법」(전성인), 「경제성장과 고용증대, 복지증진」(조복현) 등의 글은 MB정부의 정책 개관에서부터 복지에 이르기까지 고른 시선을 던지고 있다.

특히 가계 부채 증가의 근원을 이명박 정부의 통화금융정책에서 찾고 있는 전성인의 글은 경청할만하다. 금리 등을 수단으로 신용공급을 조절해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게 한국은행의 임무인데도 한국은행이 자신의 임무를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이 성장을 걱정하고 재정경제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물가를 챙기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결국은 '금융감독'의 실종 때문이다. MB정부가 출범하면서 통화정책을 제외한 금융의 모든 권한을 금융위원회가 갖게 했는데, 이런 조직 개편이 금융감독 실종으로 이어졌으며, 저축은행 사태는 그 폐해의 일부라는 게 전성인의 비판이다.

 문제는 MB정부가 도입한 서민대책 즉 미소금융, 햇살론 등도 모두 실패로 끝나고 있다는 점이다. "조만간 이 대출의 대부분이 부실화하고 그 부담은 국민이 지게 될 것"이라고 전성인은 우려한다. 그는 나아가 금산분리의 완화 역시 한국 금융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색깔만으로도 톡톡 튀는 문화이론전문지 <문화/과학> 68호는 매호가 '특집'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지금 다시 유토피아!'를 특집으로 꾸렸다. 이들은 "2011년 올해는 새로운 세계혁명의 조짐이 드러난 해다. '아랍의 봄', '유럽의 여름', '미국의 가을'을 거쳐 이제 겨울을 맞이한 세계 전체로 혁명의 조짐이 점점 더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고 운을 떼면서 "지배질서에 대한 불만과 대안의 추구가 바로 유토피아가 작동하는 원리가 아닐까?"라고 묻는다.

이러한 물음 혹은 설득의 논리는 불만→분노→지배질서 거부→더 나은 세계 계획 구현운동으로 이어진다는 다소 단선적인 구도에 바탕한다. 유토피아론의 이론적 재검토와 혁명성의 재발견, 유토피아 운동의 역사적 분석으로 문제의식을 강화한 「19세기 유토피아에서 21세기의 유토피스틱스로」(심광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론-에른스트 블로흐와 유토피아의 희망」(안성찬), 「포스트사회주의 시야로 다시 읽는 '대동'의 유토피아」(임춘성), 「실현된 유토피아? 1871년 파리코뮌의 현재성」(현재열), 「두루티의 눈에 비친 1936년 아나키즘 실험」(황보영조),「저항하는 대중들의 유토피아: 1980년 광주와 1989년 천안문」(김정한) 등의 글을 소개한다.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오늘의 문예비평>, <창작과비평>은 앞의 계간지들과 달리 '문학'을 교두보로 사회적 의제를 고민해왔다. <문학과사회>96호는 특집 「'사랑'의 사유, 담론, 현재성」을 기획, 「에로스의 말」(박상준), 「사랑과 정신분석에 관한 몇 편의 말 조각들」(윤경희),「사랑 이후 혹은 현대 이후의 힘겨움」(정성훈), 「결정적 사고」(조효원) 등의 글을 선보인다. 이러한 특집 기획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라는 지평에서 예술과 공동체, 정치의 문제를 숙의하고 있는 <문학과사회>가 '사랑'을 다시금 정치적인 것의 귀환 장정에 올리려는 시도로 보인다.

<문학동네>69호는 특집으로 「이 작가를 보라-젊은 비평가 8인의 선택」을 꾸렸다. 강동호, 강지희, 노대원, 백지은, 서희원, 양윤의, 이소연, 조형래 등의 젊은 비평가들이 정용준, 김유진, 최제훈, 손보미, 조현, 박솔뫼, 김성중, 최진영 등의 작가를 조명했다. "지금 단계로서는 대중의 무정형적 흐름이 어떤 창조적 시공간을 열어나갈지 알 수가 없다"라는 편집위원 남진우의 말이 이 작가들, 비평가들의 세계와 시선에 어떻게 조우할지 지켜볼 일이다.

부산의 문화적 자존심을 배수진으로 하고 있는 <오늘의 문예비평>83호는 역시 두 개의 특집을 꾸렸다. 시사적 이슈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삶」을, 그리고 문학적 화두로 「자기로부터의 망명」을 마련했다. 앞의 특집에는 「생명위기와 원자력문명의 종말」(신승철), 「대전환의 예감, 보이지 않는 윤곽-3·11 이후의 일본 사회」(안천),「대병겁 시대의 시학을 위하여」(이성희) 등을, 뒤의 특집에는「타자성의 정초, 미래파의 미래로 나아가기」(손남훈), 「작가적 명성과 문학적 성과-조정래와 황석영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읽으며」(고인환),「비밀과 결여-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공지의 『도가니』」(이경) 등을 엮었다.  

특히 도쿄대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에 있는 안천의 글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본 내의 여러 목소리들을 들어온 당사자의 實感을 바탕으로 쓴 글로, 생생한 현지의 반응과 함께 재앙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담론 지형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오타쿠계 문화에 대한 비평으로 유명한 아즈마 히로키, 가라타니 고진과 나타자와 신이치 등 일본 지식인들의 대응을 소개하면서 일본사회가 원전사고라는 재앙을 겪으면서 다방면의 사유들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삶의 모델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이 대지진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인식하는 기묘한 사유 행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이를 확인하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시사적이다.

특집「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를 마련한 것은 <창작과비평>154호. 2011년 봄호의 동아시아론을 '지역문학' 문제로 이어간 기획이다. 편집진들이 밝힌 것처럼, 같은 언어와 식민지 체험을 공유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현재 세계문학에서 차지하는 주요한 위상을 생각할 때,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을 묻는 일 역시 서구중심으로 구축된 세계문학의 질서에 대한 보완이자 극복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동아시아문학의 현재/미래」(최원식),「세계문학에 지방정부는 있는가」(윤지관),「전후 일본의 문학담론과 아시아적 시각」(안천),  「대만 '향토문학'의 동아시아적 맥락」(백지운) 등의 글과 강영숙, 김인숙, 김형수, 모옌, 츠시마 유우코 등의「한·중·일 작가가 말하는 동아시아문학」이 이런 작업을 수행한다. 최원식은 동아시아 지역문학이 내적 연대를 통해 세계문학을 갱신할 분권의 창조적 장소로 호명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그런 가능성의 흐름을 소설가 방현석, 유재현, 전성태, 김연수의 작품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그가 내세운 깃발은 '동아시아문학 건설의 뜻'이다. "뜻을 세우는 것이 지루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동아시아작가들, 특히 한국작가들의 높은 자각이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하다"라고 지적한다.

<창작과비평>의 「대화: 권력교체를 넘어 한국사회 새판짜기로」(김기원·박창기·정태인·이남주)도 놓칠 수 없는 기획이다. 최근 진보개혁진영에서 논의되고 있는 '2013년체제'를 집중 토론했다. 내년 총선과 대선 이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지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바, 시의적절하게 읽힌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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