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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주는 '최고의 정신사'
사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주는 '최고의 정신사'
  • 조대호 연세대・철학과
  • 승인 2011.12.2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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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헤르만 프랭켈 지음,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김남우·홍사현 옮김, 아카넷 2011.11)

새로 나온  헤르만 프랭켈(1888~1977)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이하 『초기희랍』)은 20세기 서양고전학 연구의 기념비적 저술이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이전 희랍의 시문학과 사상에 관한 연구로서 『초기희랍』은 독보적이다. 1951년 초판 이래 거듭된 중판은 이 저술의 퇴색되지 않는 가치를 증거한다. 『초기희랍』이 ‘최고의 전문가적 역량’, ‘대단히 명료한 기술’, ‘상상을 통한 고대 세계와의 진정한 공감’이 결합된 ‘최고의 정신사’(Geistesgeschichte of the best kind)라는 H. Lloyd-Jones의 평가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호메로스에서 핀다로스에 이르기까지 희랍의 정신사가 『초기희랍』의 주제다. 이 시기를 기원전 4~5세기 고전기의 선행 단계 정도로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프랭켈은 그런 목적론적 접근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 이후의 3세기는 고전기의 꽃을 피우기 위한 맹아의 시기가 아니라 특유의 순수성과 활력을 지닌 그 자체로서 완결된 시기다.

서술 방식도 『초기희랍』은 독특하다. 이 저술은 고전기 이전 희랍 세계에서 활동했던 주요 시인과 철학자를 망라하지만, 창작의 사회적 조건, 개별 시인과 철학자의 정신세계, 그들 사이의 영향 관계를 사전적·연대기적인 기술이 아니라 작가들이 남긴 단편과 작품들에 대한 엄격하고 치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분석에는 언어, 문체, 공연 형태와 같은 표현 형식, 작품의 구성과 내용, 다른 작가와의 비교 등 작품 이해에 필요한 모든 관점이 동원된다. 그렇다고 독자가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초기희랍』은 “서양고전문헌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비전공자들을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통찰을 제공하는 연구서이자 희랍 사상의 깊은 심연으로 안내하는 교양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은 『초기희랍』이 지닌 최고의 장점이다.  

집필과정에 '수수께끼의 해답' 있어

어떻게 하나의 저술이 초기 희랍 사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그 집필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프랭캘은 『초기희랍』을 1931년 괴팅엔에서 처음 구상해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마무리했다. 이 책은 1951년 미국고전학회의 지원을 받아 독일어로 출간됐다. 2500년 이전의 정신사를 다루는 이 저술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착종된 현대사의 산물인 셈이다. 책을 처음 구상할 당시만 해도 프랭켈은 아직 독일에서 활동 중이었다.

그는 유서 깊은 고전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고전학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유대인 혈통 때문에 대학에서 정식 교수 자격을 얻지 못한 그는 1935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 망명객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지만, 당시 미국의 서양고전학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었다. 프랭켈은 독일에서 시작한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자신의 연구 내용을 그리스어를 모르는 미국의 학생과 동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저자는 어디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을 드러내지 않지만, 독자는 어디서나 시대의 고난과 역경에 맞서 연구자의 소명을 다한 위대한 고전학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전체가 9장으로 이루어진 『초기희랍』은 서사시 시기(1장~3장), 상고기 전기와 이행기(4장~6장), 상고기 후기(7장~8장)로 나누어 초기 희랍 문학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는 발칸 반도에 현존하는 구술 서사시를 준거로 삼아 서사시 소리꾼의 사회적 기능, 공연 형태, 언어, 문체, 전승 형태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일리아스』의 출현 과정을 해명한 뒤, 『일리아스』에 나타난 신들과 인간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신들은 ‘세계힘’들의 형상화이고 인간은 이런 세계힘들이 겨루는 열린 장으로 드러난다.

『오뒷세이아』에서는 『일리아스』에 나타난 서사시 본연의 문체나 긴장감이 감소하면서 서사시 소멸의 징후가 감지된다. 한편, 헤시오도스의 ‘교훈체 서사시’는 시인의 사상가적 역량과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호메로스의 ‘이야기 서사시’와 구별된다. 『신들의 계보』는 이오니아 철학의 선구적 형태이고, 『일들과 날들』은 자연과학적 사유의 단초를 담고 있다. 

4장 이하에서 다루는 상고기 문학은 문체와 내용에서 서사시 문학과 뚜렷하게 대비되는데, 예컨대 절대적 현재성의 관점, 서정시적 자아의 등장, 양극적 대립성의 원리 등이 이 시기 문학의 특징이다. 크게 보면 상고기 문학은 다양한 운율의 서정시를 통해 현실에 맞선 영웅적 자아의 모습을 노래한 아르킬로코스에게서 시작돼 사랑, 전쟁, 술자리의 노래 속에 음악 정신을 구현한 사포와 알카이오스, 인간의 한계를 부각시킴으로써 고전기 인문 정신을 선취한 시모니데스를 거쳐 상고기 세계관을 정교한 형태의 합창시에 압축한 핀다로스에 이르러 완결된다.

물론 상고기의 정신은 철학의 영역에서도 관철된다. 상고기 전기 이후 ‘위기의 시기’에 출현한 ‘순수철학’은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헤라클레이토스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사상의 교차점을 찾아내는 프랭켈의 저술에서 우리는 여느 문학사나 철학사도 제공하지 못하는 통찰과 만날 수 있다.  

한국 서양고전학 수용 수준 한단계 높여

번역자들은 인용된 1차 자료들을 포함해서 방대한 원문을 유려한 우리말로 옮겼고 수많은 전문 용어들에 대한 기품 있는 우리말 표현을 만들어냈다. 번역자들이 성의껏 옮긴 원서의 ‘지식지도에 의한 색인 A’는 독자들이 희랍 문학과 사상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서둘러 출판한 탓인지 실수들이 없지는 않다. 시들이나 단편들, 특히 시모니데스의 시편들에 대한 번역에도 더 조탁이 이뤄졌다면 좋았을 것 같다.

조판에도 더러 손질할 부분이 있다. 번역서에는 원서의 장절 면주가 불완전하게 실려 있고, 역주와 원주에 일련번호가 붙어 혼란을 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초기희랍』은 기념비적 저술에 대한 뛰어난 번역임에 틀림없다. 이 번역은 우리나라의 서양고전학 수용 수준을 한 단계 높일 뿐만 아니라 서구 정신사에 대한 우리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조대호 연세대・철학과
필자는 독일 프라이브루그대에서 서양고전학과 철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술 및 번역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지식의 통섭』(공저), 『파이드로스』(번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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