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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코미디가 아니다
이것은 코미디가 아니다
  • 이향준 전남대 BK21 박사후연구원·철학
  • 승인 2011.12.1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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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현실이 소설보다 더욱 기묘하다”라는 말은 결코 소설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깨닫기 위해서는“현실이 코미디보다 더욱 우스꽝스럽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상투적인 표현들은 소설과 코미디가 끊임없이 현실의 얼굴과 대조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의미를 창출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이런 말들은 소설가와 코미디언들에게 가히 기분 좋게 들리지 않는다. 현실 속에 실재하는 기묘함과 우스꽝스러움을 그들이 미처 포착해내지 못했다는 듯한 의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들이 정작 나쁜 이유는 기묘함과 우스꽝스러움이란 낱말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이 현실과 소설, 현실과 코미디를 은연중에 하나로 묶는 지렛대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소설보다 더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져도 원래 그런 것이라고 간주하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행태가 그런 사례들이다.

얼마 전 국회가 한미 FTA의 비준을 둘러싸고 벌인 행태가 시각적 이미지로 대중 매체에 드러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다. 뒤이어 국회의 행태를 비난하면서 서울의 도심에 몰려든 사람들의 행렬과 물대포의 사진이 신문에 오르내리자, ‘물에 맞아서 죽는 사람은 없다’며 물대포의 사용을 정당화했던 경찰 지도부의 진술에도 사람들은 같은 태도를 보여주었다.

코미디언을 고소한 국회의원이라는 좀처럼 보기드문 경우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놀라운 것은 코미디언들이 특정 프로그램에서 집단적으로 그와 연관된 내용을 희화화 했다는 것이 아니다. 고소인조차 스스로 이것을 일종의 제스처, 내지는 에피소드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에게 이것은 자신이 부닥친 사태의 역설을 보여주는 한 편의 코미디였다. 고소인과 피고소인, 관람자 모두에게 고소라는 법적 절차의 실행과 취소마저도 코미디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정말로 한 편의 소설이나 코미디에 불과한 것일까.

거대한 코미디임에도 그와 동행하는 낱말 때문에 코미디로 치부되지 않는 것도 있다. 세계7대자연경관의 예비 선정을 자랑하는, 심지어 국격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하는 바로 그 곁에서 해군기지를 짓겠다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韓流라고 불리는 문화적 현상이 주목을 끌자, 해외사업에 관련한 모든 것은 외교통상부가 조정 통괄하게 만들겠다고 내놓은‘문화 외교 활성화 및 증진에 관한 특별 법(안)’도 마찬가지다. ‘나는 꼼수다’라는 제목 자체가 가르쳐주는 것처럼 애초에 코미디이고자 했던 기획이 진지한 언론으로 격상되는 웃지못할 전환도 그렇다. 더구나 이 신종 현상을 둘러싸고 통제가능성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를 더욱 어지럽게 만든다. 극구 코미디가 아니라고 정색을 하지만, 이쯤되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희비극의 기로에 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현상은 현실이 소설과 코미디를 능가하는 상황에서 이제 진실은 고작 코미디, 혹은 소설 속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어떤 것에 대한 이름으로 위축됐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런 인식은 현존하는 다른 발화 구조—대중매체—가‘지금 이 순간 사태를 잘못 전하고 있는 도구’라는 가정을 전제한다.

언젠가 니체는 사람들이 독약을 꺼려하는 논거가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 아니라, 맛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말과는 달리 사람들이 실제로 혐오했던 것은 죽이기 위해서 만든 약에 맛이 필요 없다는 논리의 냉정함과 함께 그것이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을 것이다.

논리의 냉정함은 해외 문화 활동을 외교의 하부 구조로 종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에서, 동맹과 안보를 위해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주장은 허용할 수 없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를 관철하기 위한 행정과 법적 조치들은 로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사회가 특정한‘논리’를 위해 다른‘레토릭’을 불법화하거나 무력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런 전망에 따르면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은 낱말과 설득이며, 나타나는 것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대립일 뿐이다. 이 무대에서 자신을 과시하며 춤추는 자들은 결국 자신들의 힘과 논리,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코미디의 외양은 교묘한 얼굴을 하고 있다. 교활한 인간이 니체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적절한 단맛을 입힌 독약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처럼, 현실이 그저 소설이자 코미디와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웃고 즐기라고 권유하는 와중에 삶을 피폐하게 하는 말장난만이 표면에 남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집의 티브이에서 잘 나오던 채널이 아무말 없이 사라졌다가, 낡은 화면을 한 채로 몇 개의 채널과 함께 되돌아 왔다. 이 현상이 내게는 새로운 말 장난의 표면이 시대에 뒤늦은 외양을 하고 자신의 출생을 신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결코 코미디가 아니었기에, 나는 애써 헛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향준 전남대 BK21 박사후연구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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