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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소모와 善순환
[학이사] 소모와 善순환
  • 조한경 교수
  • 승인 2002.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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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3 10:07:39

미셸 푸코가 광기와 비정상을 복권시켜 20세기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기 전까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한 바타이유. 그의 평생의 주제는 에로티즘이었다. 그러나 바타이유에게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에로티즘 자체보다도 ‘소모’의 개념이다. 소모의 개념은 많은 사회 현상들, 정치 현상들, 경제 현상들, 미학적 현상들을 밝혀주는 개념이다. ‘저주의 몫’의 작가 바타이유에 의하면 생산과 보존은 인간의 일차적 필요성에 머문다. 반면 사치, 도박, 공연, 예술, 종교적 의식, 스포츠 그리고 성행위 등 인간의 많은 행위들은 소모의 양상들이다. 좀더 깊게 성찰해 보면 생산과 보존이라는 일차적 필요성은 소모를 전제하거나 목적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가르는 기준은 많다. 인간은 만드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분된다. 인간은 타고난 손발 외에 도구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이 제작과 생산에 그쳤다면 인간도 개미나 벌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 멎지 않았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에서부터 발달된 종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종교는 다양하며,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의 구분 없이 인간 세계에는 종교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놀이하는 동물이다.
교와 놀이의 근본은 소모에 있다. 그리고 소모는 폭력의 대체물이다. 축구 없이 저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과 시청 주변에 모였다고 하자. 아마 나라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폭력적 소요 또는 혁명을 목적하지 않고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역사가 없다. 붉은 악마든 아니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을 낭비시키기 위해 거기에 간 것일 뿐이다. 일본의 어떤 이는 월드컵 관전을 위해 1년 동안 저축을 했다고도 들었다. 낭비와 더불어 인간은 스스로 위대함을 느낀다. 온 국민을 목쉬게 하면서 8강에 오른 한국 선수들은 이제 군 입대를 면제받고 몇억씩 포상금을 지급받을 것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아디다스였다는 말이 있다. 한국팀이 8강에 오른 지금 많은 돈벌이를 하는 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프랑스 월드컵 당시의 진정한 승자는 사업에 성공한 아이다스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월드컵에서의 진정한 승자는 여유롭지 않은 교수 월급에 개인당 몇 십 만원씩 지불하고 아들과 함께 축구장을 찾은 나의 동료 교수와 붉은 악마들 그리고 국민들일 것이다.
가 오는 날이면 나는 영화를 본다. 지난 주 비가 오던 어느 날 영화 ‘집으로’를 보았다. 다 알 듯이, 영화는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할머니와 외손자 상우와의 동거 이야기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는데 어떤 아가씨가 애인인 듯한 젊은이에게 ‘자기, 안 졸았어?’라고 물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전개와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재미는 다른 데서 찾아야 했다. 이 영화에서 갈등의 해결방식은 특별하다. 거대한 사건을 통한 일반적 해결방식과 달리 이 영화는 갈등을 일상적 사건을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해간다. 갈등은 산재한다. 돌투성이 시골집 마당, 금방 넘쳐오를 듯한 뒷간, 밧데리도 팔지 않는 시골가게가 귀머거리에 일자무식인 외할머니의 생활 환경이다. 반면 전자 오락과 롤러블레이드만을 즐기는 상우는 홀어머니 밑에서 막자란 대표적인 서울 아이다. 이 둘의 정서는 극과 극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할머니와 상우의 최초의 갈등은 사라지고 서로를 의지하는 사랑만이 남는다.
영화 ‘집으로’는 바타이유의 소모의 개념을 생각나게 했다. 진정한 소모는 거저 주는 것이다. 할머니는 상우에게 주되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것은 핀잔뿐이다. 그래도 준다. 할머니의 사랑은 선순환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싶게 한다. 네가 이랬으니 나도 이렇게 하련다……. 이는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베푸니 이는 받을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소모이며, 세상을 바야흐로 아름답게 하는 선순환이다.
<전북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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