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조선후기 사회의 전반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 주고,
지방사 내지는 향토사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또한 우리의 고전을 현대적 콘텐츠로 바꾸어 놓았다.”
한국의 역사는 흔히 중앙집권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각급 학교에서 교육하는 역사는 나라의 중앙인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서술돼 왔다. 중앙정계를 중심으로 한 사항만을 강조했던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8도요 350여개의 군현으로 나뉘어 졌다고 가르치면서도 실제로는 지방이 실종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지방의 실종은 그 넓은 지방에서 살던 무수한 사람들의 자부심과 희노애락을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그래서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온통 중앙의 양반들만이 살았던 듯 잘못 전달됐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눈이 점차 밝아져서 조선후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준 중요한 자료가 지방에서 생산된 각종의 문헌자료들이었다. 이 문헌자료들 가운데 邑誌는 당시인들의 구체적 생활상을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지방 군현들이 운영되는 원칙과 그 특성이 포함돼 있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살림살이나 자랑거리를 비롯해 그밖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읍지에 포함돼 있다. 거기에서는 어느 장을 넘기다 보면 봉건국가의 부당한 조세에 찌들린 촌사람들의 한숨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읍지는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더 민족문화의 보고라는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조선왕조 시대에 작성된 읍지 가운데 대표적 책자로는 『輿地圖書』가 있다. 이 책은 1757년(영조 33) 홍문관에서 각도의 감사에게 명을 내려 각 군현의 읍지를 수합해 편찬한 책이다. 그러나 『여지도서』에는 모든 군현의 기록들이 온전히 남아 있지는 않고 간간히 빠진 부분도 있었다. 당시 전체 334개의 군현 가운데 39개 관읍의 읍지가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흩어져 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은 18세기 중엽의 우리 역사와 생활상을 아는데 매우 중요한 ‘민족문화의 유산’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읍지는 이렇게 전통시대에 살던 사람들에 관한 백과사전적 성격의 기록이었지만, 비교적 뒤늦게 우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원래 이 『여지도서』는 천주교 조선교구의 주요였던 뮈텔(Mutel,1954~1933)이 수집했던 한국관계 도서 가운데 하나였다. 뮈텔은 한국교회의 순교자에 대한 남다른 흠모의 정을 가지고 그들이 살았던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손에 넣었을 게다. 이 책은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본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이때 원본에 빠진 군현들의 기록까지도 제공하기 위해, 해당 군현들이 비슷한 시기에 간행했던 다른 종류의 읍지들을 찾아 보충해 내었다. 그래서 조선후기 사회의 이해를 위해서는 영인본의 간행 자체도 각별한 학문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유하는 헌법적 가치 가운데에는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주제가 있다. 이는 국가나 국민들은 모두가 이를 위해 응분의 노력을 기울일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고등한 교육을 수행하는 대학에서도 민족문화를 창달하기 위한 노력에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서는 민족문화를 나타내는 실체에 직접 접근해 가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후기 전통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설명서이며, 당시 사회의 百科를 기록한 사전인 『여지도서』가 길잡이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모두가 난해한 한문으로 돼 있다. 그러기에 이를 직접 접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현대어로 번역하는 과제가 따른다. 우리 고전의 번역은 전통과 현대의 단절을 극복하고, 전통시대의 지혜와 오늘의 고민을 이어 주며, 새로운 상상력을 키워주는 발전의 원동력으로 만들어 내려는 작업이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여지도서』의 번역과 주석 작업은 연구책임자 변주승을 비롯해 김우철, 이철성, 문용식, 서종태, 이상식 등 연구자들이 젊음을 불태운 결과였다. 그들은 우리 고전학계에 공동번역의 모범을 제시했다.
그들은 역사적 사료의 번역을 위해 ‘빈틈없이 정확한 한문 독해력’과 ‘구조적 역사이해력’을 바탕으로 하고 ‘아름다운 한글 구사력’을 세 가지의 필수적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원칙을 자신들이 번역·주석한 『여지도서』 50책을 통해서 구현해 냈다. 이렇게 그들은 먼지에 쌓인 이 책을 화려하게 부활시켜 오늘을 사는 국민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학술연구재단이나 다른 번역기관이나 연구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출간은 조선후기 사회의 전반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주고, 지방사 내지는 향토사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에 기여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의 고전을 현대적 콘텐츠로 바꾸어 놓았다. 여기에서 파생될 많은 논문이나 문학작품들은 우리 현대문화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이 『여지도서』역주본이 가지고 있는 학술적, 사회적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들이 이 책을 번역할 때 증인이 됐다. 때로는 번역된 원고의 합의를 위한 토론과정에도 함께 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이 책을 번역하고 주석하는데 쏟은 그들의 열정과 노고를 잘 안다. 또 이 책에는 그들만의 노력이 아닌 공동연구자 김진소 신부의 노고와 애정이 깃들여 있음을 안다. 고희를 넘긴 그는 젊은 연구자들과 더불어 이 책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이들이 모여서 밤을 지새우며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던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동의 호남교회사연구소는 고전문화의 현대화를 위한 濫觴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지목받아도 좋다.
이 책은 번역하기 시작해 출간에 이르기까지 거의 8년이 소요됐다. 그후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연구자들을 보강해 천호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고전번역을 논의하고 있다. 이들의 모임은 이제 10년을 넘겼다. 그동안 이들이 함께 모여 합숙하고 토론한 시간은 거의 1년4개월 정도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10년동안 다져진 실력과 함께 머문 시간들은 우리 고전의 현대화 작업에 중요한 밑걸음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업은 전주대 이남식 총장을 비롯한 대학 당국자들의 이해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대학 당국은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숭고한 목적에 가장 충실한 작업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전주대학은 중앙에서 격리된 지방의 대학이 결코 아니다. 민족문화의 재창조를 위한 용광로에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생산의 현장이 바로 전주대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문화발전에 길이 남을 유산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新舊의 完山人들은 이렇게 『여지도서』를 재창조해서 민족의 유산으로 만들어냈다. 여기에서는 한국대학의 미래가 자라고 있다. 그것은 곧 한국 문화의 미래이기도 하다.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한국고전문화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