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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서양의 접목, 아직은 1세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전통과 서양의 접목, 아직은 1세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 김봉억 기자
  • 승인 2011.12.07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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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대에서 중국 ‘인문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한다 ①

한국과 중국 인문학자의 대화_
북경대에서 중국 ‘인문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한다 ①

현재 연구년을 맞아 북경대 방문학자로 있는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 前 교수신문 편집기획위원)가 북경대에서 중국 ‘인문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 보는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루오위리에(樓宇烈·77)의 제자로, 동서양 철학ㆍ미학ㆍ인문학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북경대 철학과의 중진이자 북경대 철학과·미학과 학부장으로 있는 장치췬(章啟群) 교수와 5시간 넘게 대담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중국의 인문학이 걸어 온 길, 그리고 현재 중국 지식인의 지형도를 살펴보고, 당대 중국 지식인의 문제인식과 고민, 중국 학술의 방향을 전망하는 자리였다. <교수신문>은 이번호부터 두 차례에 걸쳐 두 인문학자의 대화를 싣는다. 이번호에는 중국 인문학의 과거와 현재를 담았다.

일시 : 2011년 11월 16일 오전 11시30분 ~ 오후 5시 30분
장소 : 북경대 미학 연구실
대담 : 장치췬(章啟群) 북경대 철학과ㆍ미학과 학부장, 최재목 영남대 교수
기록ㆍ사진 : 서희정 북경대 박사과정
정리 :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한국과 중국의 두 인문학자가 만났다. 북경대에서 중국 '인문학'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화두로 대화를 나누었다. 사진 왼쪽은 장치췬 북경대 철학계 교수, 사진 오른쪽이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다.

최재목(이하 최) : 봄・여름에는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뵙고, 가을・겨울에는 북경대 방문학자로 와서 다시 북경에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웃음) 북경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만, 북경대 캠퍼스 분위기는 참 운치가 있습니다. 바쁘실 텐데도, <교수신문>의 특별기획으로 이뤄지는 대담에 흔쾌히 시간을 내주어 감사합니다.

더욱이 한국에도 잘 알려진, 북경대 출신이자 燕京大學(1949년 이후 북경대에 합병)에서도 교수를 지낸 펑유란(馮友蘭, 1894~1990,『중국철학사』의 저자)이 살던 집 앞의 이 유서 깊은 장소에서 대담을 하니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대담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를 기본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첫째, 현재 한국 학자들이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로 중국 지식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인문학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는가? 둘째는 현재 중국 지식인들의 사상 전개에 이르는 일종의 지식인의 계보가 있다면 그 계보는 어떤 것이며, 어떤 식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셋째, 현재 중국은 정치든, 경제든,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중국의 경제적 발전은 미국, 유럽 등을 추월해 과거 양극 구도 속의 소련(러시아)을 대신해 미국과 힘을 겨루며 최정상을 차지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학술은 어떻게 변화해나가고 있는지, 무엇을 모색하고 있는지, 학자들의 관심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장치췬(이하 장) :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반갑습니다. 최 교수님과는 우연이라기보다는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웃음).

: 사실 저는 개인적인 연구・논문 작업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자간의 국제적 교류, 대화를 통한 학술・지성의 소통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우선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래 전에는 미국에 계신 경험이 있고, 이번에는 유럽의 네덜란드 라이덴에 있으면서 학술적ㆍ문화적 시야를 넓혔다고 생각합니다. 어땠는가요, 중국인 학자 신분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유럽에서의 생활과 경험은요?

: 사실 서양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저로서는, 미국 생활에 이어, 유럽 경험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유익한,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사상은 홀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생활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경험했던 유럽의 문화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이번 기회를 통해서 역사, 문화, 현실이 함께 어우러져서 학술연구가 추진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유럽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네덜란드에서 있을 때 렌트해서 살던 집 주인만 하더라도 항상 중국의 성장을 습관처럼 거론했으니 말입니다.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이 유럽인들에게 확실히 좋은 인상을 남긴 듯합니다. 반면, 문화적으로 중국과 유럽은 아직도 너무나 많이 떨어져있다는 것을 느꼈지요. 서로간의 이해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사실 중국의 경제, 문화, 학술은 네덜란드뿐 만이 아닌 유럽 여러 곳에 근대 이전부터 이미 침투돼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교류가 증가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중국문화, 학술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겠지요. 또한 이는 중국만이 아닌 아시아 전체가 유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유럽은 아직 아시아를 보는 눈에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네덜란드에서는 일본 학자들은 유럽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서(웃음) 다르지만,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결핵 등 후진국에 흔히 보이는 병이 있을까 해서 반드시 신체검사를 하더군요. 아직 전근대적인 불편한 취급을 하는 셈이죠. 장 교수님도 저도 다 같이 받았잖아요.(웃음) 하긴 우연히 선생님을 만난 것도 그 신체검사 자리긴 했지만요.

: (웃음)그렇습니다. 유럽이 아시아와 중국을 크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인식이 좋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 그럼, 화제를 좀 바꾸기로 하겠습니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의 난, 신해혁명, 청일전쟁, 무술변법, 중일전쟁,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수용과 문화대혁명 등 참으로 부단한 격변의 시대를 지성사의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전통도 청대의 漢學에서 國學으로, 국학에서 다시 批林批孔運動으로, 文化熱로 이어지면서 복잡한 자기부정과 긍정을 되풀이했습니다. 이런 고뇌의 결과물들이 現代新儒家에서 當代新儒家로 이어져 지금의 중국인문학의 低流가 돼 있다고 봅니다.  

현재 장 교수가 재직 중인 북경대는 근대의 격동기부터 현재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립 당시 구국, 계몽, 전통과 근대, 중국과 서양이라는 복잡한 문제와 대면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근대의 중국이 서양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중국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결과 중국적 전통을 창출한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 결과 서양에 대항하는 방식에 관한 풍부한 논의가 가능하게 됐고 이러한 의미에서 북경대의 인문학(철학, 미학 등)의 전통이란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장 선생님께서 느끼는 북경대 철학과의 위상과 느낌을 한 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 최 선생님의 중국 근대 역사에 관한 이해는 아주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근대사와 북경대는 밀접하게 관계돼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이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위엔페이(蔡元培)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사실상 북경대는 차이위안페이가 학장으로 오고 나서야 근본적인 변화를 해나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중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시기 중국 현대역사에 큰 역할을 한 주요 인물들 중 다수가 북경대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우쩌둥(毛澤東)만 하더라도 한 때 북경대에 몸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 긴 역사를 뛰어넘어, 현재 북경대가 당시 선배라면 선배라고 할 수 있는 북경대 인물들의 문제의식, 관심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장치췬(章啟群) 북경대 철학계 교수
56세. 북경대 철학박사다. 현재 북경대 철학과ㆍ미학과 학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미학사와 해석학, 위진사상(魏晉思想)이다. 미국일리노이대와 네덜란드 라이덴대 방문학자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철학가와 시-당대 서양의 일부 미학문제에 관한 철학적 근원』『서양고전 시학과 미학』『백년중국미학약사』『오늘이란 무엇인가?』등이 있다.
: 우선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들을 살펴봅시다. 북경대 철학과가 중국 근대 사상,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전제 아래에서 말입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역사가 변화해나가면서 중국의 지식인들이 오로지 고뇌했던 문제는 ‘救國’ 뿐이었습니다.

또한 ‘구국’은 지식인들만이 풀어나갈 수 있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도 했지요. 이는 나라를 구하려는 움직임을 통해서 절실히 요청된 것이기도 합니다. 외부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이 선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공업의 발전이었습니다. 대포, 배로 대표되는 공업의 발전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죠.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이러한 믿음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들은 참패의 원인을 정치적 요인으로 돌리고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사상가들은 전반적인 정치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국을 위한 두 번째 시도였죠. 그러나 이 역시 좌절되고 이러한 실패와 좌절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찾게 됩니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공업을 발전시켜나가고 정치제도의 개혁을 받아들일 사상적 바탕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일어난 것이 계몽의 움직임입니다. 시대가 요청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것이죠.

: 북경대의 위치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시죠.

: 당시 차이위안페이가 북경대를 현대적 의미의 종합대학교로 이끌어나가면서 과거 전통만을 이어나가는 태학이라는 교육시스템과는 그 길을 달리하게 됐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과거의 것을 버렸느냐,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당시는 서양의 과학, 문화, 예술 모두가 밀려드는 시기였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기에 정신이 없었고 심지어 일부 지식인들은 공자를 비판하며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전통을 지켜낸 것이 북경대입니다. 후쓰(胡適), 량쑤밍(梁漱溟) 등의 북경대 인물들이 공자의 사상은 역시나 위대하다고 주장한 것이죠.

: 이러한 북경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장 선생님의 세대는 그 흐름 안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계시는지가 궁금하네요.

: 북경대 전통의 1세대는 펑유란(馮友蘭), 장따이니앤(張岱年) 등의 인물을 대표로 들 수 있습니다. 2세대는 로우위리에(樓宇烈), 주보쿤(朱伯昆)을 들 수 있고, 3세대라면 현재 활동 중인 천라이(陳来) 교수 등을 들 수 있습니다만, 천라이 교수는 현재 청화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 1세대가 서양과 대면하면서 구국과 계몽사상을 일으킨 동시에 이 과정에서 그들의 중국문화를 자각하는 등 문제제기와 해답의 과정에서 북경대 전통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군요. 또 시대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 역사의 대혼란기를 거쳐 성장했던 것이 2세대였을 것이고, 이들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3세대는 비교적 안정된 세대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러한 북경대의 계보가 지니는 핵심적 특징은 무엇이며, 선배 학자들의 전통이 어떻게 계승, 단절돼왔는지도 궁금합니다.

: 역사적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계시군요. 중국의 지식계통의 전통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이전까지 四庫書籍, 經學, 史學을 연구하던 전통을 이어나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만을 파고들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차이위안페이가 서양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시도했던 일이 지금까지의 학문을 서양학문의 구조 속에서 다시 살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로써 중국철학은 經學史가 아닌 하나의 현대적 의미의 학문으로써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哲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이죠. 후쓰에서 펑유란, 장따이니앤, 탕용퉁(湯用彤)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모두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체제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서양의 틀을 중국의 내용에 무리하게 씌우려 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2세대라면 이른바 특수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의 인문학자들이죠. 솔직히 말해서 이 시기의 인문학은 1세대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주 멀리 거리를 두고 있었죠. 주보쿤, 루오위리에 등의 인물들이 가까스로 1세대 수준에 근접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를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이들 2세대 인문학자들의 문제는 중국 전통적인 지식, 즉 사고서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그리 높지 않았을 뿐더러 서양철학의 이해 역시 1세대보다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1세대 인문학자들의 경우 대부분 미국, 독일에서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서양철학적 지식을 견고히 갖추고 있었던 반면, 2세대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국내파로 그러지 못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시기적, 역사적 요인도 작용했겠죠.

 이러한 의미에서 3세대의 인물들은 그 내용에 있어 사실상 2세대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라이 교수는 주보쿤으로부터 논문지도를 받기는 했지만 사실상 펑유란, 장따이니앤의 수업을 듣고 그들의 사상을 이어나갔습니다. 또한 3세대의 특징이라면 서양철학적 지식은 1세대를 뛰어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시대적인 요인이 적용될 수 있겠죠. 서양과의 교류가 1세대 시기와는 비교도 되지 못할 만큼 늘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국사상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는 역시나 1세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아 그렇군요. 잘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 3세대의 역할, 임무도 만만찮군요. (웃음)

: 예, 그렇습니다. 여기서 현대의 중국철학이 안고 있는, 또 풀어나가야 할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통과 서양을 접목시켜 하나의 현대적 학문으로써의 중국철학을 성립시키려는 3세대의 시도가 아직까지도 1세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중국철학이 발전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1세대 인문학자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1세대 인문학자들은 바로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그들의 철학은 생동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실용성이 떨어지고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철학은 그 시기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구국의 시기가 아니죠. 이들은 현대 중국의 발전에 적합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 그렇다면 3세대와 그 이후의 중국학자들이 과연 어떻게 1세대의 학자들을 능가할 수 있겠는지요? 북경대 지식인의 계보를 이어나가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 방법은 단지 하나 뿐입니다. 지식을 생성시키는 구조가 1세대를 넘어서야 하겠지요. 그래야만 비로소 전체적인 학술 수준이 그들을 넘어설 수 있는 겁니다.

: 지식의 ‘구조’란 것은 무엇인지요?

: 전통적인 중국의 지식체계와 서양의 지식체계 모두를 의미합니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서양에서 들여온 것입니다. 따라서 서양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1세대 학자들의 경우 대부분이 서양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미국, 독일 등 말이죠. 또한 중국지식체계 역시 알아야만 합니다. 중국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장악해야만 지식에 있어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 보완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3세대가 추구하고 고뇌하고 있는 바입니다.

: 이는 현재 3세대들이 해나가야 할 바입니까? 아니면 현재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입니까?

: 이미 이러한 단계에 와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해 나가야 할 바이기도 하지요. 제 생각으로, 중국은 이미 경제ㆍ정치적으로 발전했고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도 과거와 비교해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가는 단지 정치ㆍ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사상적 문제, 즉 사상적 방향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바로 최 교수님이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중국이 중국 자신 주변과의 관계, 나아가서 세계와의 관계를 포함해서요. 이것이 우리 세대의 지식인, 학자들이 대답해야 할 당면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지금 중국의 위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아울러 중국이 가지고 있는 전통 인문과 지성, 철학사상들을 어떻게 중국 바깥의 타자들과 공동의 유산, 공동의 기억으로 인식하고, 협력과 상생의 매개나 가교로 삼을 건지도 한번 생각해볼 문제죠. 말하자면 현재 중국의 문제는, 사실 중국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아시아, 넓게는 우리가 몸담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연관된 문제라고 봅니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공동적 과제가 될 수 있고, 국제적인 협조, 교류를 통해 풀어나갈 문제도 점점 생겨나리라 봅니다. 

: 예, 그건 그렇습니다. 그 점은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 저는 북경대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장 교수님 같은 중국 분들과 한 시대를 같이 하고 있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저도 한국에서 철학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중국사상의 계승과정과 유사하게 어쩔 수 없이, 1세대, 2세대, 3세대라는 지식의 傳과 承의 과정 속에 관련돼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1세대라고 한다면 근대적 학문시스템, 즉 대학이라는 유럽적 교육 시스템이 한국에서 처음 제도적으로 실천되던 시기의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중국의 1세대처럼, 일제강점기, 해방의 난국과 같은 굴곡과 번민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2세대는 건국과 민주화 과정에, 그리고 3세대는 민주화 이후의 현대 한국사회를 겪어왔죠.

: 아, 그렇군요.

: 뿐만 아니라 중국과 같은 구국과 계몽이라는 치열한 구도는 아니었더라도 1ㆍ2세대들은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아울러 전통학문과 유럽식 교육시스템 사이의 갈등, 그리고 다양한 반응들도 중국의 역사와 일부 겹치는 점이 있습니다.

: 근대기 중국학에 대한 이해는 어땠습니까.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51세. 일본 츠쿠바대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동아시아 철학ㆍ사상사(양명학)를 전공했다. 하버드대와 동경대, 네덜란드 라이덴대에서 연구했다. 현재 연구년을 맞아 북경대 방문학자로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의 양명학』『내 마음의 등불이다: 왕양명의 삶과 사상』『퇴계심학과 왕양명』『늪-글쓰기와 상상력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등이 있다.
: 아 그렇군요. 근대기의 이해를 공유하려면 이 이야기를 좀 나눌 필요가 있겠습니다. 솔직히, 근대적 의미의 중국학이 정착하는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우선, 지역학으로서 支那學(Sinology)이 1920년대에 일제강점기의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에서 관학으로서 자리 잡아, 그 이전의 전통 한학, 민족주의적인 국학 등과 일부 대립하며, ‘중국학’을 탄생시켜갑니다. 해방 이후, 한국은 남북이 분단되고, 남은 자유진영으로, 북은 공산진영으로 나눠지면서, 공산화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교류가 원만하지 못할 때, 즉 중국과 한국이 정식 수교하기 이전에, 자유중국(대만)을 통해 지역학으로서의 중국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1990년대에 드디어 중국과 정식 수교가 이루어지고 나서부터 대륙의 중국학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중국과 교류가 늘어나면서 대만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좀 멀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후에, 유럽을 통한 중국학도 다소 유입해왔습니다. 물론 대만의 중국학, 대륙(현 중국)의 중국학과 별도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굴곡은 있다하더라도, 일본과의 소통은 비교적 원만히 지속돼왔습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중국학은 일본의 중국학(지나학), 대만의 중국학, 이어서 중국 대륙의 중국학, 여기에다 미국, 유럽(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통한 제 3자적 입장의 중국학(=서구의 중국학) 등이 혼성적, 중층적으로 자리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중국학이 뭐냐고 묻는다면 참 대답이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공자학원까지 들어오게 되어 세계적 의미의 중국학마저 덧 씌어져 있습니다.

: 아, 그렇군요. 흥미롭습니다. 중국의 근현대 과정과 달리 또 다른 과제들이 추가되는 형태로 근현대를 겪는다는 말씀이군요. 

: 예, 그렇습니다. 좀 더 보충 설명을 드리면, 한국의 중국학은 각 시기에 따라, 방법론, 내용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상가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게 됐습니다. 현재 중국학이라고 한다면 대륙 중국학이 주류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재미있게도 대만 유학파와 대륙 유학파가 사상, 사상가, 방법론 등 여러 면에서 관점의 차이, 격차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다양한 중국학이 존재할 가능성이기도 하고, 또한 한국에서 새로운 중국학을 낳을 수 있는 긴장감 혹은 동력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을 이해하는 것은 중국을 아는 것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이기에, 한국에서 중국학이 어떻게 흘러왔는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보여드리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중국을 보는 눈은 중국 자신에게도 있지만, 중국의 바깥에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 타자들도 중국을 생각하고, 중국 문화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예, 한국과 중국이 근현대의 역사적 과정에 연속, 불연속이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서 둘은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부터 큰 변화를 겪으면서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화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본이기를 거부하고 서양을 받아들이면서 유럽화된 국가가 됐습니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에 더욱 가깝고, 일본과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를 보았을 때 말이죠.

아울러 좀 달리 보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과 한국은 어떠한 점에 있어서는 같았지만 또한 어떠한 점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에 두 국가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가 봉착한 문제는 사실상 유사한 것도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정치적으로 길을 달리한 건 사실이지만, 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중국을 넘어서게 됐고,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한국을 배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도 한국과 교류를 진행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결심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과의 적극적인 교류는 곧 소련, 북한과의 거리를 멀리하겠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오로지 한국을 배우겠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국과 한국은 문화, 전통에 있어서 사실상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적 전통 때문인지 배우기를 좋아하고 교육에 투자하고요. 또한 국가 간에 서로 장점을 배우려 한다는 점 말입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먼저 성공했으니 중국은 우선 한국을 배웠습니다. 지금의 중국이 이루어낸 경제발전은 사실상 한국을 배우겠다는 다짐과 연관돼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경제적인 방향이었다면, 문화적인 방면은 다른 방향에서 이해할 필요도 있겠지요.

앞서 간략하게 설명한 최 교수님의 ‘한국에서의 중국학 연구 상황’은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중국학의 복잡다단하고도 중층적인 구축의 길에 대한 이해는 흥미롭습니다. 비록 중국, 한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난 후 양 국가 간의 교류가 풍부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요. 저는 대학에 있으니 한국유학생만 보더라도 한국과 중국의 교류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중국학 연구 상황도 이처럼 더욱 변화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북경대 출신이자 燕京大學(1949년 이후 북경대에 합병)에서도 교수를 지낸 펑유란(馮友蘭, 1894~1990,『중국철학사』의 저자)이 살던 집이다.

: 그럼, 이어서,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펑유란과 같은 1세대가 던졌던 화두는 서양의 지식, 문화에 대항해 거기에 맞서는 中華精神을 최고단계로 더욱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화정신의 구축, 천명, 재정립은 서양을 받아들이고, 재조직해 나가는 과정의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정신의 중심인 중화사상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중국의 최고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유럽의 최고정신, 그리스 로마의 정신처럼 관념이겠지만, 한편에서는 하나의 정신과학이라고 봅니다. 신비주의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렇다면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정신은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개방적, 소통적이어야 하고,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호흡하는 것일 필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호흡한다는 것은 타자를 거울삼아 자기를 추스르는 능력이기도 하죠. 중화의 핵심정신, 사상, 문화를 타자와 대화를 통해서 객관화 할 때만이 3세대가 1세대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론해봅니다. 1세대가 만들어 놓은 지식체계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제 3자들과 상통할 수 있는 과학적 구조로 만들어나갈 수 있겠는지, 객관적 제 3자와의 교류를 거울로 삼아 자기를 구축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간략하게 얘기하겠습니다. 1세대 학자들이 서양의 학술규범에 따라 중국철학을 세운 동시에 전통 중국철학 사상을 수립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고대의 공자, 노자, 장자, 맹자, 왕양명처럼, 그들은 모두 전대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각기 새로운 훌륭한 철학자의 단계로 올라서고자 했습니다. 하나의 진정한 철학가로 말이죠. 예를 들자면 근대에 들어서서 나타난 중국 전통 사상에 이은 새로운 맹자, 새로운 노자, 새로운 장자 등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들은 각기 독창적인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이는 펑유란의 철학사 속에서도 잘 보입니다. 그는 현대 철학가를 4家로 나누어 제시했습니다.

첫째, 왕양명에 이은 허린(賀麟)이 그 중 하나로 그는 왕양명에 이어  신심학(新心學) 체계를 세웠습니다. 둘째, 슝스리(熊十力)의 유심학(唯心學)으로 그는 불교 유식종(唯識宗)에 이어 새로운 유식학을 제시했습니다. 셋째, 찐위에린(金岳霖)을 들고 있습니다. 그는 신도가라는 새로운 도학道學을 제시하며 도를 연구했죠. 넷째, 펑유란 자신입니다. 그는 신리학(新理學)체계를 세우고 이와 관련된 6권의 저작 정원륙서(貞元六書)를 발표했습니다. 이 4가가 실제적으로 계승한 것은 유가, 도가, 불교 사상이며 이에 새로운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4가로 나누어지는 학파 이후 대륙의 역사적 상황이 전변하면서 이들 사상은 기본적으로 대륙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됐습니다. 오직 무쫑산(牟宗三)만이 그 대를 이어가게 됐고, 이것이 해외 즉 홍콩, 대만에서 발전하게 된 신유가입니다.

사실 신유가는 단지 4가 중 하나의 가지가 될 뿐이죠. 신유가의 사상적 연원을 찾는다면 이는 량쑤밍, 펑유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쫑산은 슝스리의 학생이니, 신유가 역시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모든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단지 유가적 전통을 강조했을 뿐, 사실 이들의 사상은 량쑤밍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계속 재창조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신유가가 해외로 흘러나간 다음부터를 기준으로 삼을 경유, 무쫑산이 1세대라고 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2세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뚜웨이밍과 같은 학자를 들 수 있겠습니다.

: 한국에서는 뚜웨이밍, 위잉스(餘英時) 등을 보통 당대신유가라고 부릅니다.

: 네. 당대신유가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현재의 2세대 역시 무쫑산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술 이론적으로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쫑산 이론 역시 사실상 완전한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 한국에서 매우 존중돼 온 인물이라면 무쫑산입니다. 무쫑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장 : 무쫑산은 20세기 서양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본인 스스로 자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시간상 말씀을 줄입니다만, 그는 근본적으로 현상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스스로 칸트사상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해왔었습니다만, 현재의 학술적 수준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상 칸트 사상 역시 일부 내용에 있어서는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결함은 단지 무쫑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후쓰, 펑유란, 허린, 슝스리 등 이전 세대들 모두의 결함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20세기 서양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서양철학이란 서양의 철학이 극도로 발전된 상태나 수준을 의미합니다. 20세기 서양철학은 모든 문제에 있어 극도로 미세하고 분화된 해석을 진행시켰죠. 따라서 우리의 중국철학 연구도 만약 20세기 철학을 하나의 공구,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중국철학 연구는 1세대보다 더욱 발전된 양태여야 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첫째로, 중국의 전통 사상유산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장악하고 있어야 하고, 둘째로, 20세기 서양철학 역시 온전히 파악, 장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세대가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지금의 중국 사상유산에 관한 해설은 1세대보다 더욱 더 정치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추가적으로, 왜 20세기 철학이 1세대의 연구성과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요? 언어철학의 예를 들어봅시다. 언어철학은 학술 자료, 택스트 속의 언어 문제에 대해 고도로 심화된 상태로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중국 고전 원문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이 있게 해독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20세기의 고도로 발전된 언어철학을 활용한다면 중국 고전해독이 더욱 깊이 있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성립될 수 있습니다.

: 언어철학과 현상학을 전통철학에 적용하는 방법, 관점은 어떤 것인지요?

: 제가 보기에는 20세기 서양철학은 다음의 2대 사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언어철학입니다. 이 언어철학을 장악했을 때 고전원문해독에 있어 더욱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겠지요. 두 번째 사조는 현상학입니다. 현상학의 표어는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자!”입니다. 하이데거의 용어에 따르자면, ‘다자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중국사상사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 그 자체로 돌아가라는 명제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역사 그 자체인가, 예를 들자면 논어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공자가 살았던 그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로 돌아가서 사고를 진행시켰을 때, 또 원전 해석에 있어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때, 즉 이 두 가지 방면에서 고대 사상에 관한 연구가 진행됐을 때 그 결과물은 매우 심도 있고 높은 경지에 올라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해석학은 현상학의 전통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대 원문해석에 있어 반드시 그 시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대한 이해 없이는 원본을 이해할 수 없죠. 현상학이 우리로 하여금 역사 그 자체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론 외에, 하이데거의 기본적인 본체론을 이해한 뒤 역사를 대면하게 된다면, 그러지 못했던 학자들보다 훨씬 깊이 있게 원본,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20세기 철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방법론, 새로운 해석법입니다.

: 서양철학의 중국철학에의 적용이 어느 단계에 까지 올라와 있는지요?

: 결국 현재 중국에서 중국철학의 수준을 묻는 것과 같겠군요.(웃음) 현대 중국학자들 중 일부분의 학자는 중국철학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천라이(陳來), 장쉬에즈(張學智), 왕중쟝(王中江) 등의 학자들처럼 말이죠. 또 다른 부류의 학자들은, 원래 서양철학을 해오다가 중국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서양철학의 방법을 적극 활용해, 중국 고대철학 등등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을 몇 사람 들어보자면, 현재 북경대에 재직하고 있는 한린허(韓林合) 교수입니다. 한린허 교수는 중국 비트겐슈타인 연구에 있어서는 제 1인자, 그리고 언어철학 영역에서도 정상에 올라와있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 그분은 원래 유럽에서 공부를 한 경우인가 보죠?

: 아닙니다. 그는 순수한 국내학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함께 연구를 진행시켜나간 학자들은 세계적으로 최상의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의 지도교수는 비엔나 학파의 슐리크(Moritz Schlick listen)의 제자로, 말하자면 그는 슐리크의 사상을 이어받은 비엔나 학파 2대 제자라고 할 수 있죠. 슐리크는 원래 물리학자였으며 후에 철학으로 연구 방향을 전환시킨 비엔나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한린허 교수의 위치는 중국 대륙 언어철학, 분석철학 영역에서의 제 1인자의 위치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분석철학의 방법으로 莊子 연구를 진행시켰죠. 저보다 나이가 아래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학자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의 장자 연구야말로 중국 근100년 이래 드물게 나타난 진정한 학술 발전의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외의 장자연구는 사실상 그리 발전된 바가 없어 보입니다. 두 번째 인물로 장썅롱(張祥龍)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경우이지만 그의 지도교수는 한국인이었습니다.

: 아 그렇습니까? 혹시 조가경 교수가 아닌가요?

: 잘 모르겠습니다만, 버팔로대학인 것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는 원래 하이데거만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었고 또한 하이데거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요. 지금은 이를 바탕으로 노자와 유가 연구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방면에서 그의 연구 성과는 현대 중국철학이 어떻게 발전해나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지요. 그가 진행시켰던 周易 연구 등도 실로 새로운, 창의적인 연구성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위의 두 사람은 모두 북경대 출신이지만, 사실 북경대 외에도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니량캉(倪梁康) 교수의 경우입니다. 그는 中山대학교에서 재직 중이며, 훗설의 현상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그의 주된 작업은 불교 唯識宗의 영역 안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역시 20세기 서양철학의 관념과 방법으로 중국의 전통사상을 재해석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20세기 서양철학의 방법론이 실제적으로 중국 사상연구에 적절하게 활용돼 발전시켜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원래 서양철학을 전공했던 철학가들이 중국사상을 연구해나가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서구사상의 방법으로 중국철학을 연구하는 경우가 아니고, 순수히 중국사상 자체만을 연구해온 학자의 경우는 어떤지요? 

: 중국에서 중국 사상만을 연구해나가고 있는 학자들의 경우, 현재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방향은 새롭게 발견된 ‘출토 문헌’에 관한 연구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왕중쟝과 다른 한 사람이 현재 북경대의 동료교수인 왕보어(王博) 등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체계를 갖춘 새로운 이론을 창안해낸 다른 학자는 아직까지 3세대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 서양문화를 대하는 중국 인문학자들의 태도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 오늘날 중국의 인문학자 개개인 모두는 반드시 서양문화를 대면하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대답을 하고 있는가를 떠나 우선적으로 서양문화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지식 구조를 보았을 때 지식체계의 모든 구조가 서양의 것이며 중국의 학자 역시 이러한 구조 내부에서 중국의 학술을 건립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철학 역시 예외라고 할 수 없죠. 여타 학문과 마찬가지로 서양철학(philosophy)을 그 기본 구조로 두고서 철학체계를 구축시키고 있으니까요. 제 1대의 중국철학자는 서양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의 학술체계가 현재에까지 그 힘을 발휘하며 내려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중국의 대학, 중학교, 초등학교 교육에 있어서도 자연과학적 내용이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점 이외에도 엄청난 양의 인문사회과학지식 역시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중국철학의 통상적인 지식의 교육도 서양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 등의 외국어가 중국 학교 교육에 있어서 필수과목으로 선정돼 있다는 점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죠. 이 모든 점들이 오늘날까지도 중국이 여전히 서양문화를 열심히 배우고자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이 자기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민족의식이 전혀 없는 학자는 아마 극소수일 것입니다. 설사 서양문화, 서양 철학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중국인 학자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들 역시 자신만의 입장과 시각을 가지고 있죠. 한편 중국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날이 가면 갈수록 서양철학의 구조를 통해 구축된 중국철학이 사실상 수많은 중국의 고대 사상을 누락시켜왔음이 드러나게 됐습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단순히 서양철학적 구조를 그대로 모방해 결합시켜버리는 방식으로는 결코 중국철학의 이론체계를 제대로 구축시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중국 사상의 내부로 제대로 파고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철학 표현 방식 안에서 중국사상이 원초적 의의를 최대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화와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던져준 위기, 즉 말하자면 핵위협(방사능 유출 등을 포함해서), 오염, 지구온난화현상, 자원의 고갈 등의 문제를 대면하면서 중국학자들은 서양문화에 근원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자연스럽게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서양문화에 대조되는 서양 밖이라는 의미에서의 동양의 문화, 철학, 사상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데 있어 조금이라도 유익한 자원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인도 등과 같이 유구한 문명전통을 간직한 철학사상이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세밀히 고찰되게 됐습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이 관용과 화합입니다. 이는 서양과는 다른 중국문화의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문화에 있어 대항이라는 개념, 쉽게 말하자면 ‘너 죽고 나 살자(你死我活)’라는 관념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중국의 몇 천 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요. 따라서 오늘날 인류의 눈앞에 펼쳐진 위기와 미래라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 이 순간, 중국학자들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여러 문명의 우수한 정신적 자원을 흡수하는 등 인류의 지혜를 잘 운용해 인류 공통의 지식을 만들어냈을 때 인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철학자, 나아가서 인문학자라는 신분으로서 어떤 사명을 가지고 계신지요? 저는 연구를 하다가 생명을 마감하고 싶습니다만(웃음).

: 저는 절대 책상에서 제 생명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웃음). 저는 퇴직 후에 온 누리를 구름처럼 떠돌아다니고 싶습니다. 교수란 저의 직업일 뿐이지요. 그러나 제 생명의 의의는 여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것 들을 포함하고 있지요. 제가 이 세계를 위해 제 독자적인 사고를 떡하니 선사할 수 있을 그 때에, 이 세계에 무언가 유익한 존재가 되었을 때 열심히 제 역할을 발휘하고 싶습니다. 이 세계에 선사할 수 있는 저 만의 독자적인 사고를 가지지 못 한다면. 그저 보통 사람들처럼 생활하면서 천명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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