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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지식의 최전선』(김호기·임경순·최혜실·52인 공동집필, 한길사 刊)
[책들의 풍경 ]『지식의 최전선』(김호기·임경순·최혜실·52인 공동집필, 한길사 刊)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2.06.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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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이지만, 강박 느껴져

70편의 짧은 글, 강단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학자에서부터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화감독에 이르기까지 참여 필자 52명, 두께만 해도 7백12쪽에 이르는 이 책의 부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더 새롭고 더 창조적인 발상들’이다.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 ‘더’가 정확하게 두 번 등장한다는 게 재밌다. 강박이 있다는 말이다. 아니 스스로 ‘강박’당하려는 것으로도 보인다. 디지털 영상 시대이다 보니, 사실 문자를 중심에 두고 펼치는 사유의 드러내기, 사유의 엿보기는 이미 ‘강박증’을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의 책 ‘지식의 최전선’은 문자 패러다임에 익숙한 지식인 사회가 우리 시대의 길거리에 배치한 ‘지적 바리케이드’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이 바리케이드를 어디에 설치했느냐 일 것이다.

대중문화, 디지털 기술, 나노테크놀러지, 생명복제, 인간의 정신활동, 근대화에 대한 반성적 지평, 인문학의 새로운 전환, 새로운 문명의 시대 등 8개의 주제 아래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첨단과학, 예술 및 대중문화 등을 포괄한 29개 분야의 ‘학문적 쟁점’을 소개하고 그 토론과 전망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개념풀이와 인물소개’, ‘더 읽어야 할 책’, ‘가볼 만한 사이트’ 등도 양념처럼 뒤따른다. 쉽게 말해 요즘 잘 나가는 분야를 정리하고, 쟁점 요약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마치 잘 짜여진 지식의 백과사전을 겨냥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과연 이런 백과사전식 구성이 ‘지식의 최전선’일 수 있을까.

저자들은 이 책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싸우고 있는 지식의 최전선에서 우리 학문의 현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동시에 미시적으로 해부하고자 기획되었다”고 말하면서, 숨은 그림 찾기식 구성임을 강조한다. 이런 구성이라면, 독자들이 댓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

공동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대전환의 시대다. 이 시대의 怒濤는 과학기술의 혁신이 이끌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가져할 지혜는 자명하다.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식과 학문은 이런 현실적 흐름을 진단하는 동시에 미래를 기획하는 것을 본연의 과제로 한다. 공동저자들은 힘주어 말한다. 여기 실린 70편의 글들은 하나하나가 퍼즐 조각이라고. 이 조각들은 서로 아귀를 이루며, 그래서 책의 곳곳을 즐겁게 산책해가다 보면, 거대한 하나의 큰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주며, 퍼즐을 맞추어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 시대 학문 전체의 청사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이 책의 기획에 참여한 한길사의 이승우 차장의 말을 들어보자. 세상이 너무 빨리 변화하고, 학문 담론 역시 빠르게 변하다보니, 전공 분야 이외의 연구자나 대중들에게 세상의 흐름과 학문의 변화를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이게 기획 취지였다. 1백 개의 주제를 골라서 작업에 들어갔지만, 성과는 70편.

그나마 글의 수준도 고르지 않다. 올 초 학기가 시작할 때 책을 내려했는데, 아쉬움도 그만큼 크다. 우려하는 부분도 있다. 전공의 울타리 안에서 ‘지식의 최전선’에 오른 몇 몇 글들을 접하면, 이게 뭐냐 하고 비웃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바로 여기, ‘전공의 울타리’ 밖에 있는 우리시대의 많은 비전공 분야 연구자들에게는 좋은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월드컵 열기가 뜨거운데도 출간 열흘만에 2쇄에 들어갔다.

‘지식의 최전선’을 꼼꼼하게 챙겨 읽어나가다 보면, ‘전공 학문’에 대한 물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냥 눈감고 지나쳐야 할까. 내가 공부하는 세계 바깥의 더 넓은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려는 노력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백과사전이란 무엇인가. 지식의 거대하고 단일한 총체화를 향한 관념의 모험아니었던가. 극미의 세계, 다양성이 물고기처럼 살아 날뛰는 시대, ‘총체화’를 향한 관념의 모험은 그것 자체가 모험일 수밖에 없다. ‘지식의 최전선’은 ‘지혜’를 구해, 세상의 흐름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경직된 ‘지식’의 파편들이다. 여기서, 거듭 ‘독자’의 존재가 부각된다. 나는 이 숨은 그림 앞에서, 이 막막한 퍼즐 앞에서, 이 질풍노도의 시대 앞에서, 이 아슬아슬한 바리케이드 앞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흐름을 보여주되, 흐름을 ‘변화’로 전환시키는 ‘나’의 고뇌가 잘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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