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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완득이」?
계몽영화 「완득이」?
  • 허정 동아대 교수
  • 승인 2011.12.07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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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영화 「완득이」의 기세가 무섭다. 이 글을 쓰는 11월 23일 현재 「완득이」는 5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400만 관객을 동원했다. 다문화가정의 아픈 가족사를 훈훈하게 그려낸 탄탄한 서사, 출연진들의 뛰어난 연기, 걸쭉하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무거운 상황을 발랄하게 전복시키는 유머 등에 관객들은 환호하고 있다.

「완득이」의 이러한 흥행 속에서 놓칠 수 없는 점은 다문화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다. 한국사회에 뿌리 깊었던 순혈주의 신화는 그동안 다문화가정이나 그 자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특히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이들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서는 이런 점을 찾기 어렵다. 관객들은 완득이가 성장통을 극복해가길 응원하고, 공동체의 어엿한 일원으로 성숙해가는 모습에 안도해한다. 그리고 다문화가정을 친밀한 이웃으로 수용한다. 이 영화는 새로운 아이돌로 부상한 유아인을 필리핀 이주여성과 한국인 소수자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인으로 설정했지만, 관객들은 까무잡잡한 피부색의 유아인을 불편함 없이 수용한다.

이러한 반응은 예사롭지 않다. 배우들의 열연과 영화적 재미가 영화의 메시지를 아무리 부드럽게 포장했다고 하더라도, ‘이주민·다문화인과의 공존’이라는 메시지가 관객들의 정서와 대치되었다면, 이러한 폭발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에 내재해있던 완고한 순혈주의가 서서히 해체되고,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다문화사회를 향해 진전해가고 있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관객들의 이러한 반응만으로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로 깊이 진전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음 세 측면을 주목해보자. 먼저 영화가 호출하는 관객들의 위치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관객들을 호명하는 자리는 선생 동주와의 동일시 지점이다. ‘봉사하고 싶다’ 혹은 ‘멘토 역할의 중요성을 확인했다’는 누리꾼들의 반응처럼, 관객들은 다소 폭력적이지만 혼신을 다해 헌신하는 동주의 입장에 동일시하여, 그들 역시 동주와 같은 멘토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동주와 완득이의 관계는 한 쪽이 다른 쪽에 도움을 주는 시혜적인 관계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자리에 있는 멘티와 도움을 받는 멘토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 거리를 허물고 우리 자신의 타자성(우리 자신이 이미 다문화인이다)을 수용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동주의 역할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것은 완득이가 자신의 주체정립을 위해 벌이는 내적 고뇌와 적극성을 대폭 제한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영화가 그려낸 이주민·다문화인의 범위다. 완득이는 반항적이지만 빗나가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 또한 성장통 끝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을 수용하고 사회에 적응해가는 대견함마저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는 완득이처럼 착한 인물이 아니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다문화인도 많다. 영화 속 기독교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 교회는 다문화사회구성원들을 품고 공존하려는 종교로 나타난다. 여기에 대해 기독교 일각에서는 「완득이」의 흥행이 한국 기독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쇄신하고 교회 이미지 개선에 적잖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청와대에서도 이 영화의 특별시사회가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노력은 인정해야겠지만, 이주민과의 공존은 특정 종교의 선도적 역할 아래 풀어갈 문제만은 아니다. 이주민들의 수도 필리핀과 같은 기독교국가 사람보다도 이슬람이나 힌두공동체의 사람들이 더 많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상정하고 있는 이주민·다문화인의 범위는 너무 좁다. 영화 속 인물들을 대표성을 지닌 전형으로 볼 수 있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거기에 환원되지 않는 이질성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괜히 딴지를 걸고 싶다. 관객들의 수용은 위험성이 제거된 채 길들여지고 포섭된 이들에 국한된 것은 아닌가? 한국사회에 선한 모습으로 동화되지 않는 자, 교회와 같은 한국 내의 공적 기구에 매개되거나 포교되지 않는 자, 좋은 이웃으로 인식되지 않는 자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영화의 낭만적인 해결이다. 「완득이」의 결말은 갈등이 해결되고 다 잘될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갈등도 영화처럼 봉합될 수 있을까? 설혹 영화처럼 이주민·다문화인들이 좋은 이웃으로 수용되더라도 그들은 언제라도 다시 적대시될 수 있다. 경제위기 같이 한 사회의 질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게 되면, 좋은 이웃으로 이야기되던 이주민들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가해지는 표적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한국인의 향락을 박탈해간 절도자, 혹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회적 문젯거리, 한국사회의 근간과 고유문화를 해치는 불순물 등으로 인식되어 질시·추방의 폭력이 가해지는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영화의 낭만적인 결말은 다문화사회에 내재된 이러한 골 깊은 갈등을 은폐하는 영화적 환상으로 작용한다. 갈등이 재점화되는 현실은 이러한 환상에 계속해서 균열을 가할 것이다.

이상의 점들을 함께 고려하면서 「완득이」의 성취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 점들을 놓치고 「완득이」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 한국다문화사회의 진전을 말한다면, 이 영화는 관리와 통제 위주의 배타적인 정책을 펼쳐오다가 최근 사회통합성을 높이는 다문화정책으로 전환하게 된 국가정책, 혹은 그 선두에서 사회적 소명을 다한다고 믿고 있는 기독교의 고투를 선전하는 계몽영화로 전락할 것이다. 그때 이 영화는 다수중심의 틀을 해체하기보다는 다수자의 입장을 교묘하게 확장해가는 한 방편으로 기능하고 말 것이다.

허정 동아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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