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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서 출발한 논리경험주의, 미국에 정착하다
빈에서 출발한 논리경험주의, 미국에 정착하다
  •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
  • 승인 2011.12.0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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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역사, 사회: 과학철학의 변모 ① 빈, 베를린, 프라하

과학적 탐구의 과정에 포함된 요소를 설명하고, 형식논리학과 실제로 통용되는 방법론·형이상학 등의 관점에서 그 요소들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철학으로 알려진 '과학철학'. 국내 과학철학 연구가 30년을 넘어섰다. 그 한 가운데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가 서 있다. 송 교수는 1995년 한국과학철학회 창립에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최근 송 교수의 업적을 기리자는 취지에서 출간된 『과학철학-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박영태 외 지음, 창비, 2011.11)에는 한국 과학철학 연구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의 논문「논리, 역사, 사회: 과학철학의 변모」가 함께 실려 있다. 과학철학에 관한 논의가 전개된 역사적 배경과 계기 및 전개양상을 개괄한 그의 글은 과학철학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준다. 3회에 걸쳐 그의 글을 게재한다.

<글 싣는 순서>
① 빈, 베를린, 프라하
② 냉전과 과학철학/역사와 사회의 부활
③ 과학기술 비판에서 과학기술윤리로

   1920년대 유럽 여러 곳에서 일어난 조직적인 과학철학운동은 양자물리학의 화려한 개화와 때를 같이한다. 1923년 플랑크의 제자이며 빈대학 철학 교수인  슐릭이 주도한 세미나에서 결성된 빈학단은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를 표방했다. 5년 뒤에는 베를린에서 라이혠바흐 등이 경험철학회를 만들었다. 헴펠에 따르면 논리경험주의는 과학에 관심 있는 철학자들과 철학에 관심 있는 과학자들의 공동노력으로 태어난 것이다. 1930년부터 카르납과 라이혠바흐를 편집인으로 잡지 <인식>이 창간되었다. 비슷한 때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뮌스터, 웁살라, 르보브, 바르샤바 등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학파들이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 이름을 붙이고 과학철학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미 1912년 아인슈타인, 힐베르트, 마흐, 프로이트, 실러, 퇴니스, 클라인, 럽 등이 서명한 실증주의철학회의 선언에는 경험적 사실 자체를 연구하자는 주장이 보인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마흐가 대표하는 19세기의 근본적 경험론과 프레게, 러슬의 논리를 결합해 전통적인 철학 및 과학의 개념을 뒤엎는 혁명가들로 자처했다. 그들은 과학방법의 전통적 문제들을 떠나 과학용어의 의미, 과학적 설명의 구조, 그리고 과학법칙들의 논리적 지위를 분석했다. 이 운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 관념론 전통의 역사주의와 스펜서의 진화주의에 대한 반동을 볼 수 있다. 특히 논리실증주의는 역사와 윤리를 철학의 영역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1929년 빈학단이 ‘과학적 세계관’을 선언했을 때 회원은 14명이었다. 주요 멤버에는 파이글 (철학), 한 (수학), 노이라트 (사회학), 크라프트 (역사학), 카우프만 (법학)이 있었고 늦게 참여한 카르납 (철학), 프라하에서 자주 찾아온 프랑크 (물리학)의 기여가 컸다. 외국인으로는 에어 (영국), 헴펠 (독일), 콰인, 블룸버그 (미국), 제이모나트 (이탈리아), 훙춘 (洪謙, 중국)이 있었고 포퍼 (철학), 칠젤 (사회학), 켈젠 (법학), 베르탈란피(생물학)도 가끔 나타났다. 뒤에 슐릭이 암살당하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빈학단은 거의 해체되었다. 그러나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영국, 미국으로 이주 또는 망명해 활동을 계속했고 과학철학은 미국에서 그곳의 경험주의 전통과 손잡아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빈에서 출발할 때 논리경험주의는 본디 어땠으며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전혀 다른 모습의 과학철학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프로이트, 쇤베르크, 비트겐슈타인이 활동한 1920년대의 빈은 유럽의 천재들이 모여들어 최고의 지적 창조성을 유감없이 펼친 곳이었다. 대다수의 초기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전문 철학에서만큼이나 문화와 정치 문제에 대한 정열을 갖고 있었다. 특히 노이라트, 카르납, 프랑크는 논리경험주의와 유럽의 여러 가지 문화, 정치의 제도와 운동 사이의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카르납은 평생 인공 국제언어에 관심을 가졌고 노이라트는 박물관, 공공교육에서 일했다. 그들은 모두 바우하우스에 초청받아 강의했다. 그들은 또한 레닌 등 마륵스주의자들,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논쟁을 했으며 프랑크는 과학주의, 실증주의에 대한 신토마스주의자들의 비판에도 호의를 보였다. 두 사람은 정치논쟁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노이라트는 1919년 바이에른 사회주의혁명에서 중요한 몫을 했고 라이혠바흐는 베를린대학에서 사회주의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뒤에 그 대학 교수 자리를 놓쳤다.

   빈학단은  전통철학 비판을 홍보하고 과학적 세계관을 대안으로 대중화하기 위해 대중에게 접근했다. 논리경험주의자들은 빈에서 에른스트 마흐협회의 공개강연을 이용했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노이라트의 통일과학운동을 통해서 했다. 이 운동은 여러 과학들을 통일하고 조정해 현대생활을 사려 깊게 꾸미고 계획하는 도구로 더 잘 쓰일 수 있도록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보통 시민들이라도 반동적ㆍ 반과학적인 진영의 몽매주의적 수사를 더 잘 평가하고 사회의 집단적 목표를 도울 미래의 통일과학을 계획하는 데 공헌하도록 인식론적ㆍ 과학적 정교화를 촉진하려 했다. 논리경험주의와 노이라트의 통일과학운동은 함께 계몽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20세기의 과학, 논리, 사회사상, 정치의 발전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의 약속을 명세화하고 그 실현을 돕는 것이었다.

   논리경험주의는 1930년대에 미국으로 갔다. 1930년에 이주한 파이글을 빼고는 카르납 (1935)에서 괴델, 칠젤 (1939)까지 후반부에 몰려들었다. 대부분 노이라트의 통일과학운동의 참여자로 미국에 갔는데 노이라트 자신은 네덜란드와 영국에 머물며 운동을 지휘했다. 통일과학운동은 그들에게 빈, 베를린, 프라하에서 가졌던 접촉과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제 집과 같은 안식처였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 이미 과학철학의 사회ㆍ 정치적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던 미국 철학자들과 망명 철학자들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미국 쪽에서 가장 적극적인 철학자는 프래그머티스트 모리스였다.

   유럽에서는 통일과학국제회의가 해마다 열렸다. 1934년 프라하에서 시작한 국제회의는 파리 (35), 쾨븐하운 (36), 파리 (37), 케임브리지 (38)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39), 시카고 (41)로 끝났다. 국제통일과학백과사전은 유명하지만 통일과학잡지도 몇 번 나왔다. 미국에서 논리경험주의자들은 지식인, 철학자, 논리학자로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ㆍ 문화운동의 대표로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통일과학운동을 끝나게 했고 뒤이은 냉전이 그 회복을 막았다.

    모리스는 논리경험주의의 이동에 가장 공이 크다. 그는 유럽에 있는 동지들에게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게 했고 번역을 주선하기도 했다. 라이혠바흐, 카르납, 프랑크의 취직을 도운 것도 모리스였다. 모리스는 시카고대학 출판부에 통일과학백과사전을 소개했고 시카고대학이 통일과학운동의 중심이 되기를 바랐다. 백과사전은 처음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백과사전과 통일과학운동은 지성의 중심 뉴욕에서 유명해졌다. 원로 철학자 듀이를 비롯해 네이글, 훅, 칼른 등이 논리경험주의를 도왔다. 대전이 터지면서 백과사전 출판은 어려움에 빠졌다. 1943년 시카고대학 출판부는 백과사전을 중단했다. 노이라트와 카르납의 갈등, 논리경험주의와 통일과학운동이 전체주의적이라는 칼른의 비난으로 뒤틀리더니 종전 직후 노이라트의 갑작스런 죽음은 통일과학운동에게 큰 타격이었다.

   1947년 통일과학운동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노이라트의 가까운 친구이자 생각과 스타일이 비슷한 프랑크가 나섰다. 그는 보스튼에 통일과학연구소를 만들려 했고 지도체계도 윤번제로 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때마침 모리스가 라키펠러 펠로우여서 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소를 꾸려 갈 셈이었다. 연구소가 백과사전을 맡고 통일과학회의를 조직하며 새 프로젝트들을 개발할 복안이었다. 프랑크는 특히 과학사회학 연구를 장려하는 데 열심이었고 과학용어 사전, 학생 논문 발표 모임을 기획했다. 그러나 연구소는 잘 되지 않았다. 프랑크의 아이디어가 전문적이고 대중과 거리를 두는 과학철학을 추구하는 파이글, 라이혠바흐 등 중진 철학자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크가 연구소의 대중적인 의제와 동료들의 전문적인 의제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는 사이에 프로젝트들은 흐지부지되었다. 라키펠러의 지원은 1955년 끊어졌다. 백과사전도 단행본 20권으로 1970년 끝났다.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 /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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