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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언제 눈물을 흘릴까
편집자는 언제 눈물을 흘릴까
  • 이승우 출판인
  • 승인 2011.12.02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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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외근을 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한 선생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막 번역을 마친 원고를 이메일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더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에 근처에서 원고를 출력한 나는 자유로를 달리면서 힐끔힐끔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북받쳐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 14년차 출판인이었던 나에게 그 원고는 지금껏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번역자에게 전화를 걸어“저에게 이런 책을 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울먹이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번역자는 김헌, 그가 번역한 원고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이었다. 처음 읽는 책도 아닌데 내가 눈물을 쏟았던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시학』의 원문은 번역해서 200자 원고지 500~600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김헌 선생의 번역 원고는 무려 4천매를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번역문과 함께 그리스어 원문을 싣고, 거기에 더해 단순한 역주가 아닌 고전문헌학에 바탕을 둔 주해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시학』연구의 성과를 모두 포괄한, 명실공히『시학』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우리 출판사에서 키케로의『수사학』을 같은 방식으로 주해해 책으로 펴낸 바 있었지만, 이번 원고는 좀더 완벽한 작업을 통해 註解書의 표준을 제시한 역작이었다. 20여 년간 집요하게 한 우물만을 파온 연구자의 혼이 오롯이 담긴 그런 원고를 보고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 나는 고전문헌학史에 관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고전문헌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기 시작했다. 고전문헌학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인문학자들에게도 좀 낯선 학문일 테지만, 그 고전문헌학적 전통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인문학’내지‘인문정신’의 근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르네상스’니‘문예부흥’이니 하는 말들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인문정신’의 개념이나 의미가 이 책을 통해 올바르게 교정됐다. 그것은 바로“학문의 존재, 그것은 책(텍스트)에 의존한다”라는 저자의 의미심장한 말에서 결정적으로 인지됐다.

이 책에 따르면, 페트라르카, 에라스뮈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초기 인문주의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일은 도서관이나 몰락한 귀족의 개인 장서고, 수도원들을 헤매고 다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 고생을 해서 그들이 하고자 한 것은 파묻혀 있던 고대문헌의 필사본을 발굴해 그것을 바탕으로 고전고대를 이해하기 위한 주석을 다는 작업이었다. 에라스뮈스의 다음 말을 보면, 그 감흥이 다가올 것이다. “매우 오래된 도서관에서 무언가를 사냥하고 있었는데(숲에서 하는 어떤 사냥도 이보다 즐겁지 못하다) 내 덫에 대단한 포획물, 즉 로렌초 발라의 신약성서 주석이 걸려들었다.”주해 작업은 단순한 텍스트 교정이 아니었다. 그러한 지난한 작업 끝에 그들은 후마니타스, 즉‘사람다움’이란 곧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임을 파악했다. 결국 고전고대가 단순히 학문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가장 사람다운 사람’(genus humanissimum)의 전형을 선취한 시대라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전문헌학이 서양의 거의 모든 학문의 토대였다는 사실이다. 프랑수아 라블레, 토머스 모어, 후고 그로티우스, 아이작 뉴턴, 로버트 보일, 헤르더, 괴테, 멘델스존, 바흐, 에드워드 기번,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 문학을 하는 사람부터 과학자, 철학자, 음악가, 역사가 등 서양 학문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 대부분이 고전문헌학을 연구했거나 그 전통에 해박했다는 부분에서‘엄밀한 학문’인 고전문헌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솔직히 나는 지금껏 나름 인문출판인이라고 자부해왔지만 이 책을 만들면서는 부끄러워졌다. ‘인문정신’의 거대한 뿌리를 과연 내가‘인문출판’을 통해 구현해낼 수 있을까 自問해보았을 때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학』의 번역 및 주해라는 대장정을 마친 김헌 선생에게“이제『시학』연구의 큰 마무리를 하셨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자, “이제 시작입니다”라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인문학적 전통은 수많은 인문학자들이 궁벽한 곳에서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연구를 묵묵히 수행해온 결과 축적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서양 고전고대의 고전들 거의 모두가 그렇게 텍스트를 발굴하고 글자 하나하나를 분석해 주해를 다는 작업을 통해 생명력과 권위를 얻었다. 고전문헌학의 힘, 대단하지 않은가. 요즈음 감히 하고 있는 생각은, 서양 근대학문은 고전문헌학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승우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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