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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적 난제 해결할 새로운 휴머니즘의 가능성을 묻다
지구적 난제 해결할 새로운 휴머니즘의 가능성을 묻다
  • 김경연 부산대·국문학
  • 승인 2011.11.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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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_ 환대의 도시 부산에서 처음 열린 세계인문학포럼

부산은 환대의 도시다. 타지로 떠나던 자들과 타지로부터 도착한 이들이 모이고, 정주민과 이방인이 만나 스스럼없이 공생하던 곳.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린 피난민들에게 마지막 삶터가 되어주고, 숱한 이방인들의 절망과 희망을 품 넓게 받아들이던 도시. 그러니 이 도시의 역사는 순일한 정주사가 아니라 불순한 이주의 서사이며, 이방인과 정주민의 섞임의 역사다. 혼종성을 기껍게 제 몸으로 껴안은 이 환대의 도시에서 최초의 세계인문학포럼이 열렸다.

유네스코, 교육과학기술부, 부산시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번 세계인문학포럼(11월 24일~26일, 부산 해운대 벡스코)의 주제는 '다문화 세계에서의 보편주의'이다. 세계화가 심화되고 국가 간 이주와 越境이 일반화된 오늘의 다문화적 상황은 문화 交通의 긍정적 확대를 가져온 동시에 문화 간 충돌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주와 다문화의 상징적 도시 부산에서 열린 첫 세계인문학포럼은 학문의 변방으로 내몰리고 있는 인문학에서 이 지구적 차원의 난제를 해결할 새로운 휴머니즘(New Humanism)의 가능성을 묻는다. 

지난 24일~26일, '이주와 다문화의 상징적 도시' 부산에서 첫 세계인문학포럼이 열렸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다문화 사회에서의 보편주의'였다.

이번 세계인문학포럼은 모두 세 개의 기조강연과 다섯 개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개막 첫 날 ‘세계화와 보편윤리: 수용, 권리, 문화가치’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 김우창 교수(이화여대·영문학)는 최근의 세계화를 하나의 세계문화가 생성할 수 있는 도전이자 기회로 파악하고, 이 신종의 세계현상에 적합한 “보편적 윤리”의 기획을 제안했다.

인문학은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하는가

德化와 文化의 통치를 이상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윤리정치, 수다한 가치와 정체성을 하나의 정치질서 안에 통합하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한 하버마스, 원시사회의 에토스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초자연의 이상적 조화로 재독한 레비스트로스의 논의를 참조한 김 교수는 인류가 함께 만들어 나갈 보편적 윤리와 세계문화 역시 다양한 문화한 인간 “인간 집단의 평화적 공존을 확실히 하고 보다 충실한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구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날 연사로 나선 프레드 달마이어 교수(노트르담대·정치철학)는 인문학이 가시적 이익이 없다는 반인문학적 비난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내재적 善을 추구하는 인문학이 세계적으로 만연한 갈등과 폭력의 상황을 감소시키고 '인도적인 코스모폴리스(cosmopolis 세계도시)'의 도래를 위해 공헌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피력하기도 했다.

‘열리는 문’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날 기조강연을 맡은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와 모리셔스를 함께 조국으로 품은 자신의 다문화적 정체성을 성찰하면서, 문학이 “정체성이라는 혼란스러운 문제에 대해 항상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왔”다고 환기한다. 르 클레지오는  개별성과 보편성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문학을 통해 역사와 지역을 가로질러 다채로운 문화들이 공존하고 대화하는 상호문화적 가능성의 도래를 확신하기도 했다. 

이번 포럼에 마련된 다섯 개의 세션은 전체회의와 분과회의로 나뉘어 ‘문화상대주의와 보편주의’, ‘글로벌 시대의 다중정체성’, ‘문화갈등의 양상과 전망’, ‘지구윤리와 문화소통의 가능성’ 등 다채로운 주제로 진행되었다. 또한 유네스코, 교육과학기술부, 한국연구재단, 부산시가 ‘뉴 휴머니즘을 향하여’, ‘한국 인문학의 부흥’, ‘지역성의 인문학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분과회의를 열면서 60여 명에 이르는 국내외 인문학자들의 열띤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문화상대주의와 보편주의’ 세션에서는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문화상대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한편, 이와 적대하지 않는 새로운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논의들이 펼쳐졌다.

인도의 미카란드 파란자페 교수(자와할랄네루대학·영문학)는 “문화상대주의와 보편주의의 대립관계는 유럽적인 이분법으로서 우리가 벗어나려고 하는 근대의 유산”이라 지적하고,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계는 “차이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인간 가치에 대해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표준”인 “변형-보편주의(alter-universalism)”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시대의 다중정체성’ 세션에 참여한 팔 아흘루왈리아 교수(남호주대·사회문화이론) 역시 유럽중심적 휴머니즘의 개념을 재사유·재정의한 에드워드 사이드나 폴 길로이를 주목하면서 “경직된 형태의 정체성과 고정된 인종 분류 체계로부터 빠져나가 공생공락(conviviality)”하는 새로운 “지구적 휴머니즘”의 창안을 제안했다. 그 밖의 세션들에서는 문명 간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인문학의 역할, 인류와 자연, 인류와 과학의 조화로운 만남을 구현할 수 있는 포스트 휴머니즘, 미학과 윤리학의 새로운 조우 가능성 등이 다양하게 타진되었다. 

다양한 인문학자들과 일반 대중의 만남 기대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한 ‘한국인문학의 부흥’ 분과회의에서는 송기동 교육과학기술부 대학지원관과 이한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이 발표자로 나서 2007년 이후 한국정부가 추진해 온 인문한국지원 사업, 해외한국학, 인문학의 대중적 소통과 확산을 위한 인문주간 행사 등 한국 인문학의 다채로운 도전과 축적된 성과를 소개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저소득층, 다문화가정 등)를 위한 인문학, 인문 한류, 통일 인문학의 모색 등 앞으로 한국 인문학의 중흥을 위한 중장기적 과제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부산시 주관으로 열린 세션 ‘지역성의 인문학적 성찰’에서는 김형균 부산시 창조도시본부장이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 사례를 통해 인문적 도시담론이 도시재생과 커뮤니티의 회복이라는 실천적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지역성의 인문학이 “획일화된 삶을 요구하는 세계화에 맞서는 동시에 국가 내부 차원에서 수도권 문화의 모방에도 대응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의 발표 역시 흥미로웠다. 이 대표는 “시민들 스스로 지역의 고유성에 바탕을 둔 지역문화 모델을 만들어 다른 도시들과 대등하게 교류하는 잠재력을 길러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이번 세계인문학포럼은 개최 첫 해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다양한 지역과 국가의 인문학 전공자들과 인문학 애호가들의 호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충남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조영준 씨(25)는 이번 포럼에 참가하면서 단일민족국가를 표방해온 한국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타 문화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진주 경상대에서 교육윤리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라는 우크라이나 출신 올가 로가초바 씨(Olga Rogachova, 23)는 세계적인 규모로 개최된 인문학포럼에 처음으로 참가한 흥분을 전하며, 다문화 상황에 처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타문화에 대한 관용과 존중을 가르치는 인문교육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세계인문학포럼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고 정착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적지 않다는 지적도 많았다. 부산지역에서 문화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정현 씨(23)는 세계인문학포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보다 많은 국외 인문학자들이나 제도권 안팎에 있는 다양한 인문학 주체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울러 일반 대중들이 보다 쉽게 인문학적 대화의 장 안에 발 들여 놓을 수 있는 새로운 세션의 마련을 주문하기도 했다. 

환대의 도시 부산에서 열린 첫 세계인문학포럼을 마감하면서 세 인문학자가 주는  조언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은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방인은 첫 물음을 제기하면서 나를 문제선상에 올려놓는 사람”(환대에 대하여)이라는 자크 데리다의 말. “다문화주의란 문화의 표면적인 나열이나 진열”이 아니라 “대등한 공존에 대한 지향성, 또는 공존방식을 둘러싼 이념”(다미가요제창)이라는 재일코리언 사회학자 정영혜의 말. 그리고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장치란 무엇인가)라는 조르조 아감벤의 말. 이들의 조언처럼 다문화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사유하는 환대와 동시대성의 인문학을 창안하는 일. 이것이 이제 첫 걸음을 뗀 세계인문학포럼에 주어진 장구한 과제가 아닐까.

김경연 부산대·국문학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문학평론도 하고 있으며 평론집으로 『세이렌들의 귀환』이 있다. 현재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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