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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벌’에 빠진 비주류생물학자와 생물학계의 기인
‘맵시벌’에 빠진 비주류생물학자와 생물학계의 기인
  • 교수신문
  • 승인 2011.11.2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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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아버지의 오래된 숲』(서소울 옮김, 이순, 2011.11)

아버지와 아들. 家業을 잇는다고 말한다. 같은 분야를 걸어가는 父子에게는 그들만의 넉넉한 향기가 있게 마련.‘ 현대의 소로’,‘ 현대의 시튼’이라 불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저명한 생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미국 버몬트주립대 동물학과 베른트 하인리히(Bernd Heinrich) 교수도 그의 아버지와 깊게 연결돼 있는 사람이다.

메인 주의 통나무집에 살고 있는 그가 펴낸『아버지의 오래된 숲』은 ‘아버지’, ‘ 숲’ 두 가지 명사가 서로 침투하고 있는 책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를 추억 속에서 활자 속으로 호명해내는 행위가 이렇게 책으로 묶여 나왔다고 해서 단순히 사적인 개인기록으로만 한정해서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들 가족사로 축소해서 읽으면 근현대 생물학사 100년의 발자취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가족사의 구심점은‘아버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 내가 과학자가 되고 작가가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지대하다. 우리 가족의 역사를 만든 주역은 두 번의 전쟁만이 아니다. 생물학이라는 학문이 바야흐로 거대한 지각변동을 맞던 시대에 자연의 생태를 알고 싶어서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바쳤던 사람들 역시 주역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 대학에 보낼 돈은 한 푼 없어도 막노동으로 모은 돈을 맵시벌 연구에 모두 바쳤던 고집불통이었다. 그렇게 그는 평생을 맵시벌 연구에 열정을 바친 곤충수집가였지만, 현대 과학의 급격한 발전으로 생물종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고전적 생물학이 역사의 뒤로 밀려나면서 함께 주류의 뒤안길에서 씁쓸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누가 주류의 뒤안길에서 시대와 함께 저물어간 ‘아비’를 닮고 싶어하겠는가. 그토록 닮지 않겠다던 아버지였지만, 베른트는 결국 아버지의 근처를 배회하면서 운명의 길을 걷는다. 그 자신 이 박물학자의 감성을 지닌 현대적 생물학자가 되고 만 것이다. 동물행동학자인 베른트 하인리히는 ‘생물학계의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북동부 메인 주 숲속에 직접 통나무집을 짓고 살면서 동물들을 관찰, 기록하고 연구하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UCLA 교수직을 그만두고 메인 주 숲속으로 들어간 그에게 버몬트주립대에서 교수 초빙을 했을 때, 그가 내건 조건은 학교 강의 이외에 숲속 생활을 할 시간을 최대한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숲속 통나무집은 그가 기억 속으로 사라진 아버지와 대면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국부론』에 묘사된 자본주의를 벌의 경제구조와 비교해 논의한 첫 책『뒤영벌의 경제학』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일약 생물학계의 유망주로 떠오른 그는 정확하고 섬세한 관찰, 기발한 실험, 예리한 통찰을 바탕으로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파헤친 많은 과학 명저들을 저술했다. 도래까마귀와 올빼미, 박각시나방, 겨우살이 동물들, 호수, 숲 등 그의 시선과 관찰이 머무는 곳마다 그만의 탁월한 현장 생태학이 피어났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현대의 소로’,‘ 현대의 시튼’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맵시벌 연구에 일생을 바친 희귀종 아버지에 관한 기록인 이 책『아버지의 오래된 숲』은 생물학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저 육신과 정신을 건네준 아버지의 아들의 시선으로 아버지가 남긴 일기와 편지, 메모, 그리고 지인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삶을 재구성했다. 픽션적인 구성이 없진 않겠지만 이쯤 되면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행위, 그렇게 활자 속으로 기억을 못박아두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버지와 엇나갈 수밖에 없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박을 당할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다듬어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을 더 갈고 닦아야 했다. 박물학자로서 아버지가 철칙으로 삼았던 것들 역시 아들의 몸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모든 가능성에 생각을 열어둘 것, 관찰할 때는 신중하고 주도면밀할 것, 사실에 비춰 끊임없이 나의 해석을 점검하고 개선할 것, 최선을 다해 끝까지 파고들어 결과를 도출할 것. 결국 아버지의 박물학자적 감성과 윤리의식이 스며들어 베른트 하인리히는 변종 생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학문적 방식, 그래서 살아서는 결코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아들에 의해 완전하게 받아들여졌다. 아버지가 가졌던 꿈과 열망, 아들인 자신에 대해 품었던 기대와 고뇌의 흔적들을 뒤쫓으며 비로소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생전에 나누지 못한 아버지와 대화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시대 연구실의 고독한 학자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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