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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사회적 역할 축소 …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시각
의사의 사회적 역할 축소 …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시각
  • 교수신문
  • 승인 2011.11.2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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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맥스웰 그렉 블록 지음,『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박재영 옮김, 청년의사, 2011.11)
어떤 책을 손에 잡기까지 그리고 그것을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우리는 다양한‘정서적’경험을 하게 된다. 책은 주로 정보를 전해주지만 독자는 그것을 각자 나름대로의 경험과 선지식에 비춰 보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감동을 주고 어떤 책은 귀중한 정보를 준다.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인데도 나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 책을 보면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하고 새로운 관점을 얻어 즐겁기도 하다.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화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저자와 나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 중 하나다.

미국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인 맥스웰 그렉 블록이 쓰고 한국의료윤리학회 상임이사인 박재영이 옮긴『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이 바로 그랬다. 저자의 주장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거북했던 것이다.

저자는“환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이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때문에 오히려 의학의 공공적 역할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솔직한 논의를 하기가 어렵다”(22쪽)라고 주장한다. 책 속에는 환자 개인의 복지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이상과 공공의 이익에 봉사해야 할 의무 사이의 갈등에 관한 다양한 사례가 제시돼 있다. 하지만 이것을 히포크라테스 선서‘때문’이라고 보는 건 말머리에 마차를 세우는 격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형이 집행되는 장소에서 환자(사형수)의 죽음을 확인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의사의 사례다.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집행했는데도 의학적 확인 결과 죽지 않았다면 의사는 그 사람을 살려내야 하는지의 문제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한 의사는 법적으로 곧 죽게 될 사람이라도 일단은 살려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법은 그에게 사형 집행의 보조 역할만을 부여한다.

‘살림’을 요구하는 히포크라테스와‘죽임’을 요구하는 법 사이에 끼이게 된 것이다. 저자 블록은 이처럼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사형 집행일에 맞춰 휴가를 떠나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살림’을 절대적 가치로 삼는 히포크라테스의‘신화’를 버려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의에는 사형이라는 제도 그 자체에 대한 반성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형수가 겪어야만 하는 고통에 대한 어떤 고려나 관심도 없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아닌 거추장스런 행위규범으로만 보는 단견도 드러난다. ‘살림’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문학적 반성은 의사의 행위에 명확한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적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10년 이상 단 한 건의 사형도 집행되지 않아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 된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진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히포크라테스의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곧‘의학적 필요성’이라는 새로운 덫에 걸리고 만다. 의학적 필요성은 보험금 지급 여부나 법적 권한과 같은 이해관계가 걸린 다툼에서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라크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에게 외상후장애 증후군(PTSD)이라는 진단을 내릴지 말지는 전적으로 의학적인 문제 같지만 사실은 무척 정치적인 문제다.

새로운 진단과 치료기술의 개발은 특정 질병 진단의 범위를 점차 넓혀가게 하는 압력이 되고 있다. 실제로 치료제 시판 이후 고혈압의 진단 기준은 많이 내려갔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약을 복용해야 하는 환자가 됐다. 관련 기업들은 그 진단기준의 확대를 위해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이는데, 의사들이 그 로비의 직접 대상이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약 기업의 이해관계를 의학적 필요성과 혼동하기까지 한다.

“모든 의학적 진단은 정치적이다(175쪽)”라는 선언은 이런 정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의학이 정치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릴 때에만, 우리는 임상진료 속에 암호화돼 있는 가치관에 대한 탐구나 토론을 시작할 수 있다”(25쪽)고 하면서도 그 짐을 의사들에게만 지워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의 처방은 그 짐을 시민사회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가 그런 지향에 있어 장해가 된다는 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현대인이 이해하는 히포크라테스는 이미 신화 속의 존재가 아니다. 현재 통용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나치 의사들의 잔혹한 생체실험에 놀란 세계의사협회가 1948년 고대의 원문에서 종교적 색채와 비현실적 부분을 덜어낸 것이다. 이후 다양한 수준의 의사 집단에서 다양한 형태의 윤리강령들이 탄생했지만 생명의‘살림’과 환자에의 ‘헌신’이 의사라는 직업의 가치지향이어야 한다는 큰 흐름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저자는 히포크라테스를 신화라 말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히포크라테스는 역사 속에 살아있으면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의사의 원형이다. 옮긴이는 원제인‘히포크라테스의 신화’를‘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로 옮겼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미래를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신화든 역사든 우리가 알아야 할 히포크라테스는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꾸짖는다. 저자는 그 꾸짖음이 싫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것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들어버린다.

이 책은 미국에 사는 정신과의사이며 법학자인 저자가 철저히 미국적인 현실을 철저히 미국적인 시각으로 풀어 쓴 책이다. 그는 임상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명확히 구분한다. 그에게는 치료의학만이 의학이다. 사회적·자연적·문화적 환경과 건강의 관계를 연구하는 예방의학, 사회의학, 인문의학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기개발에 기술이나 지식을 제공하지 말라는 영국의사협회의 권고를 도를 넘는 거만함이라 부를 만큼 의사의 사회적 역할을 축소한다.

그는 이런 차이가 영리를 위주로 하는 미국과 공익에 바탕을 둔 영국 의료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미국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나간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불편하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저들은 바로 이 논리를 가지고 우리의 아픈 몸을 노다지를 캐는 시장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저자의 주장이 있을 뿐 그에 대한 반론은 소개돼 있지 않다. 그래서‘살림’과‘헌신’이라는 히포크라테스의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시장’이 어떻게 우리의 인간성을 수탈하는지를 보여주는 책과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제롬 캐시러가 쓰고 최보문이 옮긴『더러운 손의 의사들』(양문, 2008)을 추천한

다. 신화가 아닌 역사 속의 히포크라테스를 읽고 싶다면 반덕진의『히포크라테스 선서』(사이언스북스, 2006)가 좋은 안내가 될 것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인문의학연구소장
영국 웰스대에서 공부했으며, 대한의사학회 부회장, 한국의철학회장으로 있다. 지은책으로는『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공저), 『몸의 역사, 몸의 문화』,『 생명, 인간의 경계를 묻다』(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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