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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명품’을 만들었다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명품’을 만들었다
  • 장진성 서울대·고고미술사학과
  • 승인 2011.11.28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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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歲寒圖」를 다시 보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인「歲寒圖」는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간략하고 거친 그림이 꼿꼿한 선비의 성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세한도」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과장된 것이라는 일부 지적도 제기되 바 있다. 이와 관련, 장진성 서울대 교수가 전국역사학회대회에서 발표했던 논문「명작의 신화-김정희 筆‘세한도’의 성격」은 시사하는 바가 많아, 지면에 발췌해본다.

歲寒圖, 김정희 , 1844, 종이에 수묵, 23x69.2cm, 개인소장

 국보 제180호인 金正喜(1786~1856)의「세한도」(1844년, 개인 소장)는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문인화이자 김정희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돼 왔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1843년 역관 이상적(1804~ 1865)은 계복(1736~1805)의『晩學集』과 운경(1757~ 1817)의『大雲山房文藁』를 북경에서 구해와 김정희에게 보내줬다. 그는 이듬해인 1844년에 다시 김정희에게 하장령(1785~ 1848)의『皇朝經世文編』을 보냈다. 「세한도」를 그리게 된 근본 이유는 고가의 중국 서적을 자신에게 보내 준 이상적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즉「세한도」는 이상적이 구입해 준 책들에 대한 답례로 그려진 작품이다.

이상적은「세한도」를 받은 후 다음 번 연행에 이 그림을 가지고 가 김정희와 교분이 있는 청나라 문인들로부터 題跋을 받을 생각을 김정희에게 전했다. 김정희의 승인 하에 1844년 북경에 간 이상적은 1845년 정월에 오찬, 장요손 등 16명의 청나라 문인들로부터 제발을 받아 그림과 함께 하나의 手卷으로 合裝했다. 그는 이들의 제발을 통해「세한도」의 금전적 가치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세한도」는 청나라 문인들의 제발들과 함께 장황됨으로써 중국 지식인들이 공인한 김정희의 뛰어난 그림으로 격상됐다.

쓸쓸한 화풍의 원조는 원나라 화가 예찬

「세한도」는 매우 단순한 구성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는 몇 그루의 나무들 사이로 텅 빈 집이 보이며 화면 전체에 추운 겨울날의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김정희의「세한도」는 원나라 화가였던 예찬(1301~1374)의 양식을 기초로 그려진 그림이다. 「용슬재도」(1372년, 대북 국립고궁박물원)에 잘 나타나 있듯이 단순한 구성, 前景의 텅 빈 정자와 높이 솟은 나무들이 예찬 양식의 핵심이다.

예찬 양식은 후대 문인화가들이 선호했던 화풍이다. 예찬 양식이 지닌 단순한 구성으로 인해 후대의 문인들은 비교적 손쉽게 예찬 그림들을 모방해 그릴 수 있었다. 예찬 양식은 명대 말기에 간행된 다양한 화보들을 통해 조선에 소개됐다. 김정희는 이러한 화보들을 통해 예찬의 양식을 학습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세한도」와 같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예찬 양식을 김정희와 같은 餘技畵家들이 선호했던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특별히 그림에 재주가 없는 문인들도 손쉽게 예찬 양식을 바탕으로 회화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 남아있는 김정희의 산수화들은 모두 倣예찬 그림들이라고 할 수 있다.「 荒寒山水圖」(선문대박물관), 「산수도」(일본 고려미술관), 「疏林茅亭圖」(간송미술관) 등 현존하는 김정희의 산수화들은 예외없이 화보를 통해 익힌 예찬 양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그림들이다. 이러한 초보적인 수준의 산수화들은 김정희를 과연 화가로서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준다.

특히「소림모정도」와「산수도」는 거의 습작에 가까운 그림들로 전혀 예술적인 작품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김정희의 산수화들을 기준으로 김정희를 평가한다면 그는 초보적인 여기 화가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세한도」또한 습작에 가까운 매우 평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 화가의 습작 정도에 불과한「세한도」는 어떻게 명작이 됐을까. 누가「세한도」를 명작으로 만든 것일까.

흥미롭게도「세한도」에 대한 기존 연구는 이 그림에 대한 양식적인 분석과 성격 규명보다는 주로 김정희의 발문에 나타난‘歲寒後凋’의 의미를 극도로 강조해 왔다. 김정희는 발문에서『論語』의 子罕편에 나오는 공자의“추운 겨울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라는 구절을 인용해 이상적이 권세가가 아닌 유배객인 자신에게 책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2006년에 열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기획 전시인『秋史김정희—학예일치의 경지』도록의 경우「세한도」에 보이는 한겨울의 추위를 척박한 유배지에서 느낀 김정희의 심리적 추위로, 초가집의 왜곡된 형태를 그의 삶을 왜곡시킨 유배지의 낯선 공간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 도록에는 잎사귀가 없는 노송 가지들은 유배지에서 메말라가는 김정희 자신을 상징하며, 두 그루의 잣나무와 다른 소나무 한 그루의 높이 솟은 모습은 이상적의 김정희에 대한 변함없는 신의를 표상한다고 서술돼 있다.

 

미술사는 위인전 쓰는 학문 아니다

「세한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세한도」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그림을 통해 유배생활을 읽어내려고’했던 것이다. 「세한도」는 그림의 기교와 형식보다는 내용과 정신을 중요시 한 문인화의 진수를 보여주며 김정희의‘학예일치’,‘ 서화일치’의 경지를 보여준다는 것이 기존 연구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즉「세한도」는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김정희 자신의 이미지로 확대 해석되면서 그의 삶과 정신을 알려주는 가장 핵심적인 작품이 됐으며 그 결과 명작이 됐던 것이다.

「세한도」에 대한 글들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김정희의 학식, 학예일치의 경치, 유배객으로서 김정희의 고독하고 절망적인 삶, 그의 절개와 불굴의 정신, 이상적의 스승에 대한 변함없는 존경과 지조, 김정희와 이상적의 깊은 사제지간의 정 등은 사실「세한도」자체를 분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한도」작품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닌「세한도」를 통한 해석자들의 주관적 이야기일 뿐이다. 작품 자체로 평가해 볼 때 「세한도」가 명작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는 기량으로 평가되는 것이며 그림은 작품 자체의 우수성으로 논의돼야 한다.

여기 화가인 김정희가 그린 평범한 산수화를 명작으로 평가할 경우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미술사는 偉人傳을 쓰는 학문이 아닌 작품 자체를 분석하고 평가, 해석하는 학문이다.「 세한도」에 대한 기존 논의들은 학문적 분석과 해석이 아닌‘위인 김정희’에 대한 賞讚에 불과하다. 즉 김정희를 위인으로, 「세한도」를

위인이 그린 위대한 명작으로 숭배하고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은 명작으로 탄생했으며 여전히 명작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이 신화가 깨질 때만이 비로소 「세한도」의 성격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규명될 것이다.

 

장진성 서울대·고고미술사학과
예일대에서「왕휘(1632-1717)와 청초 산수장권 제작의 역사적 의미」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동기창과 서양기하학」,「 조선후기 사인풍속화와 여가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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