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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열정이 빚은 '한국의 자존심' … "민족문화 사업 확신"
40년 열정이 빚은 '한국의 자존심' … "민족문화 사업 확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1.23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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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漢韓大辭典』과 중재 장충식 박사

 

중재 장충식 박사는 한한대사전의 구심점이다. 그의 의지가 빚어낸 사전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 어떤 문화적 사건이든 자신의 뜨거운 상징을 갖기 마련이다. 단국대의 뜨거운 상징은 『한한대사전』이다. 그리고 이 사전의 구심점에는 36세에 총장에 취임해 오직 사전 하나를 향해 달려왔던 中齋 張忠植 박사(80세), 한 사람의 열정 가득한 생애가 놓여 있다.

중재 선생은 사전을 만들던 40대 그 시절로 되돌아가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그럼 다시 사전 만드는 일에 달려들겠다"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여든의 나이에도 목소리에 흐트러짐 없는 8척 장신의 중재였다. 그의 전공은 동양문화사. 그렇다보니 한학 연구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다.

漢學을 기본으로 한 전통 인문학을 연구하는데 필수불가결한 工具書는 한자사전이다. 한자사전 제작은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 경쟁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만큼 문화적 자존심이 걸린 사안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 1883~1982)는 중국에 유학 중 독자적인 한자-일본어 사전을 편찬키로 결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원고가 불타고, 출판사가 파산 위기에 몰리는 시련을 겪었지만 아들과 제자들이 매달려 32년의 시간을 들인 끝에 『大漢和辭典』을 펴냈다.

청년 실업가 시절에 구상한 야심찬 작업

한한대사전 내지
이에 자극을 받은 대만은 정부기구인 국방위원회가 중심이 되고, 중국학술원이 실무작업을 맡아 『中文大辭典』을 10년 만에 완간했다. 이같은 주변국의 움직임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 역시 사전 편찬을 국책사업으로 진행했다. 중국의 학문적 요충지라 할 산동, 안휘, 절강, 강소, 복건 등 5개 省과 상해시가 연합해 역내 43개 대학, 연구소와 유관 학자가 망라된 인력을 투입했다. 1975년에 착수해 15년만인 1993년에 『漢語大詞典』전 12권을 완간할 수 있었다.

원전해독에 필수적인 한자사전이 없는 탓에 우리나라 학자들은 외국어로 된 한자사전에 의존을 해야 했다. 이런 불편함을 당시 학계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동양사를 연구하던 젊은 학자 중재의 생각은 달랐다. 직접 사전을 만들어 돌파하겠다는 구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대학원을 다니며 實業家의 길에 한 발을 내딛고 있던 27세 때, 그는 이미 지도교수였던 고 정재각 교수의 조언에 따라 사전 편찬의 야심을 품고 있었다). 1967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단국대의 초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이 같은 구상은 본격화됐다. 그때 중재는 36세, 젊디젊은 나이였다.

중재 선생은 우선 당시 국학계의 태두인 一石 李熙昇 선생을 찾아갔다. 자신의 사전 편찬 구상을 밝혔지만, 돌아온 대답은 "사전 편찬 작업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할 수 없다"라는 거절이었다. 삼고초려 끝에 동양학연구소 소장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일석 선생은 10년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일석 선생이었지만,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급여가 지급됐는데도 막무가내로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급여가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정년도 마친 학자가 하는 일도 많지 않은데 이렇게 많은 돈은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급여를 거절해서, 할 수 없이 중재는 조금 액수를 뺀 급여로 타협아닌 타협(?)을 했다. '딸깍발이' 일석 선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랜 산고와 준비작업 끝에 석학들을 자문위원으로 초빙해 1977년 10월 편찬실을 구성했고, 한학자들을 편찬원으로 채용해 1978년 6월 편찬 실무를 착수했다.

40대의 젊은 총장이 사전 편찬 작업에 전폭적으로 힘을 쏟고 있다고 해서 작업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 재단, 학교 내부에서 쏟아지는 '반대'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대학 재단마저 사업의 방대함을 들어 승인을 거부하고, 선배 학자들도 만류했다. 중재 선생은 "우리 대학의 창학 이념인 민족문화에 기반한 대학 교육의 차원에서, 그리고 미래 후손에게 문화 유산을 남겨주지 못했을 때의 부끄러움"을 내세워 구성원들을 설득했다. 민족문화의 앞길을 여는 사업임을 역설했지만, 주요 보직자들의 사업 우선 순위 변경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총장이었던 중재는 과감한 결단을 했다. 사업을 계속 반대하는 주요 보직자를 교체해버렸던 것이다.

212만매의 원고와 남이 가지 않는 길

 "무슨 일이 있어도 사전 편찬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었다"라고 중재 선생은 말한다. 걸림돌은 대학 재정구조 약화, 구성원의 반대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학자 총장이다보니 정권으로부터 '入閣' 권유를 자주 받았다. 그는 "입각 제안은 참 난처한 일이다. 장관으로 나가게 되면 결국 사전 작업은 소홀하게 되기 때문에, 늘 저쪽의 체면도 세워주면서 거절하는 묘안이 필요했다"라고 말한다. 중재에겐 입각보다 사전 편찬 작업을 계속해가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든의 나이에도 그는 지금 평북지방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을 집필중에 있다. 언어와 문자를 숙명으로 짊어진 우리 시대의 거목이다.
사전 편찬에 착수할 당시 45세의 '청년 총장'이었던 중재 선생은 사전 작업이 완료된 2008년 77세를 맞았다. 중재 선생의 초빙을 받아 편찬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일석 선생, 이가원 선생, 김동욱 선생 등의 원로 학자들은 세상을 달리했다. 젊은 편찬원들은 정년을 하기도 했고, 손자 뻘의 편찬원이 뒤를 이어 주석과 교열에 청춘을 바쳤다. 연인원 20만 명, 212만매의 원고, 13만 2천 8백 여 일의 작업기간이 쌓이고, 쌓인 결과로 우리 학계는 한국어로 된 한자사전을 갖게 됐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고독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주변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회고하는 중재 선생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국가에서 하는 사업도 아니고, 서울대처럼 규모가 큰 대학이 벌인 일도 아니다보니 '너희가 할 수 있겠냐'라는 미덥지 못한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재단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해 대기업 총수를 만나기도 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 '사전 편찬'에는 도통 관심을 주지 않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같이 대한체육회 일을 할 때, 그분이 뭐 도와줄게 없냐고 물어보더라. 차마 사전 작업 도와달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 회장은 다른 쪽에 즉각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그때 제대로 도와달라는 말 못한 게 후회된다"라고 활짝 웃기도 했다.

"남이 가지 않는 길,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일을 하는 것, 그게 보람있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중재 선생은 지금 장편 대하소설을 집필중에 있다. 6권이 이미 출판됐고, 7~8권을 탈고중이다. 평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대하소설이다보니 사라진 '평북 방언' 재현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중재는 언어와 문자를 숙명으로 짊어진 사람이다. 중재와 중재의 『한한대사전』열정을 만난 것은 우리시대의 축복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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