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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운동의 모델을 바라보는 두 시선
21세기 사회운동의 모델을 바라보는 두 시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1.21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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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외문화진흥원, '프랑스 지성의 새 지평-아시와와의 대화' 시작

프랑스 해외문화진흥원이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7일(월) 오후 2시 프랑스의 젊은 知性史家 프랑수아 퀴세가 방한, '프랑스 68운동의 정치적ㆍ철학적 영향'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과ㆍ문화연구학과)의 사회로 백승욱 중앙대 교수(사회학과),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영상이론과)의 강연과 토론도 진행됐다. 중앙대 법학관 2층 대강당에서였다.

이 프로그램은 올해부터 프랑스 해외문화진흥원이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더욱 진흥하고, 특히 아시아 주요 국가의 지성과 프랑스의 지성이 교류할 수 있도록 '프랑스 지성의 새 지평 ─아시아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새로이 시작하면서 마련됐다.

1968년 5월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프랑스 전역을 채웠다.

이번 프로그램은 두 가지 점에서 시사적이다. 첫째, 프랑스 해외문화진흥원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 둘째, 최근 '월스트리트 점거(Occupy Wall Street)' 운동이 미국을 비롯 영국 등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프랑스 68혁명(특히 상황주의자들)'로부터 모티프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사회운동의 모델은 러시아혁명이었고, 21세기 사회운동의 모델은 68혁명이다”라는 말처럼, 최근 시민사회운동이 68혁명으로부터 지적 영감과 실천적 자양분을 건네받았다는 일부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프랑스 낭테르대 미국문명학과 교수인 프랑수아 퀴세의 기조강연 「욕망의 정치, 정치의 욕망-프랑스 68운동의 교훈」과 백승욱 교수의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다시 생각한다-알랭 바디우와 문화대혁명의 종별성」, 심광현 교수의 「68혁명의 문화정치적 모순과 이행의 문제-19세기 혁명 이념의 장기지속과 68혁명의 역사적 의의 」의 주요 부분을 발췌했다.

프랑수아 퀴세 프랑스 낭테르대 교수
프랑수아 퀴세 교수(왼쪽 사진) : 프랑스의 5월 혁명은 프로들의 혁명과는 거리가 먼, 제어 불가능한 반란, 미래를 위한 반란, 진행 중인 반란이다. 단지 구시대의 권력을 물리치거나 그들과 타협해 모두를 위한 참여권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과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기존의 범주에서 탈피, 1960년대 서구 사회를 구성하는 길들이기와 제어의 방식이기도 했던, 분류의 방식을 거부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대도시에서는 학생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하면서 학생신분을 거부하며 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공표하는가 하면,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시위 시에 지위나 임금인상을 요구하던 것과 달리, 그들이 속한 노조의 지시를 무시하고 젊은이 문화와 관습의 자유화를 부르짖었다. 화이트칼라나 사회 엘리트는 그들이 속한 지배계급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고, 여성들은 정형화된 여성의 운명을 거부하고, 이성 커플과 출산, 감상주의, 가정생활을 거부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게 된다.

학생신분을 거부하는 학생들, 단순히 노동자신분만이 아님을 주장하는 노동자,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지도층, 여성이길 거부하는 여성들, 이들의 반란은 지배범주의 해체, 개인 및 주체의 탈주체화를 통해 기존의 그룹을 백지화하고, 함께 살고 함께 투쟁하는 명분을 다른 세계에서 추구하고자 했다. 대안 문화, 연령을 초월한 연대에의 국제적 참여, 처음으로 다른 방식의 집단적 삶을 상상하고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5월 중순에 학생들이 “우리는 모두 독일 유태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한 것은 그들이 단지 학생혁명의 저명한 지도자이며 동지였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공식적으로 독일 국적이란 이유로, 덜 공식적으로는 유태인이기 때문에 초기 시위 때에 추방당해서만이 아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아닌 것을 소유하며 스스로를 은폐하고, 덮어쓰고, 그들이 자신이 더 이상 아니라는 자유를 주장하고 반대로 그들이 아닌 존재 또는 그들이고 싶지 않은 자가 오히려 그들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제시한 분석으로, 그에게 정치는 한편으로 재정과 분류 등의 사회관리를 의미하며,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실망에서 출발하여 모든 분류방식을 넘어서는 것, 거부 속에서도 행동에 몰입한 새로운 집단 주체의 분출을 의미한다. 관리로서의 정치가 영구적이라면 연대적 봉기의 정치, 집단적인 재주체화는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랑시에르는 결론을 내린다. 프랑스 역사상 이런 드문 정치적 행위가 이렇게 명확하게, 1968년의 5월만큼 집요하게 발생한 경우는 소수이다.

백승욱 중앙대 교수 : 문화대혁명은 단지 혁명적 유토피아의 계기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새롭게 열은 것만큼이나,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것을 포함해 많은 가능성과 현실성을 ‘닫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대혁명의 분석을 통해 그것이 어디서 ‘새로웠는가’ 못지않게 어디서 왜 ‘붙잡히고’ ‘꺾였는가’를, 그리고 무엇을 은폐했는가까지 보아야 현대 정치의 아포리아와 대면할 수 있다. 그것이 종결될 수 없는 ‘최후의 혁명’인 이유는 그 아포리아의 근본적 검토와 해결 없이 정치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광현 한예종 교수 : 68혁명에서 급진적 학생과 지식인들은 분명히 부분적인 개혁이 아니라 기성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와 제도 전반의 총체적 변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들은 기성 제도의 반대에 대해서는 일치했지만, 대항 제도의 구성에 관해서는 일치가 아닌 불일치, 연결이 아닌 분리로 나아감으로써 급속히 소멸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새롭고도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됐던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의 반권위주의적 변혁, 인간 역능의 확장을 포함한 주체양식과 생활양식의 변혁(문화혁명)이라는 문제제기는 여성운동과 녹색운동, 이주노동자 운동, 장애와 각종 차별에 저항하는 다양한 소수자 운동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발전, 확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운동들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생산양식을 변혁하려는 전통적 운동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분리돼 있다.

이 두 차원의 분리가 지속될수록 좌파의 정치적 공간은 점점 더 협소해질 수밖에 없음을 지난 40년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제 미국헤게모니의 붕괴와 함께 이행의 시대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여럿으로 분할된 마르크스를 하나의 마르크스로 통합하고,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코뮌주의라는 역동적 전망하에서 더 심원하고 확장된 형태의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계급적ㆍ비계급적 좌파 간 연대체계를 하루 속히 창안해나가야 한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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