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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52 귀지
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52 귀지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1.11.2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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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지는 마냥 그대로 두는 것이 ‘無爲自然’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까마득히 머나 먼 반세기 전 대학생 때의 일이다. 나이 지긋한 여승 한 분이 자상한 얼굴로 한참 날 뜯어보더니만 “학생은, 참 귀만 좀 컸으면 나무랄 데가 없는데…”하고 스쳐지나가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스님이 말한 ‘귀’는 耳殼라고도 부르는 바깥귀(外耳)의 한 부분인 ‘귓바퀴’를 말한다. 귓바퀴의 겉은 안으로 조금 말리고, 안쪽은 조글조글하게 구겨진 주름이 잡혀 음파모음에 중요한 구실을 하니, 밀랍(wax)으로 주름 새를 말끔하게 메워 보면 그것의 역할을 안다.

가끔 귓바퀴에 주름이 없어 조개모양으로 밋밋한 경우 수술까지 한다고 하고, 심지어 숫제 귓바퀴가 없이 태어나는 小耳症(귀의 흔적만 있음)이나 無耳症(귀의 형성이 전연 안 됨)도 있다. 개나 당나귀 따위는 귓바퀴를 쫑긋 세워서 이리저리 소리가 오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귀가 좀 먹은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면서 손바닥을 귀에 모아 귀담아 들음). 사람들은 귓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動耳筋(세 개의 인대와 여섯 개의 근육으로 됨)이 퇴화해 흔적기관으로 남았지만 더러 그것을 좀 움직이는 이가 있다.

우리는 귓밥(귓불)이 두툼하고 길게 늘어진 귀를 ‘복귀’라거나 ‘부처님 귀’라고 한결 좋게 보지만 서양인들은 그런 귀를 ‘당나귀 귀'라 해 ‘바보’로 취급한다. 서양만화에 그려진 당나귀는 얼간이, 고집통을 비꼬는 것임을 알자. 그런데 남자에만 귓구멍 어귀에 굵은 털이 나니 이렇게 남녀 한 쪽에서만 생기는 유전적인 특징을 從性遺傳(sex-linked inheritance)이라 하며, 대머리, 적록색맹, 혈우병들도 모조리 남자에 많이 생기는 유전이다.

음파는 귀의 입구에서 고막에 이르는 外耳道를 타고 들어가 고막을 때린다. 외이도는 길이 2.5cm, 지름 0.6cm로 단면은 난원형이면서 S자형의 관으로, 거기에는 가는 털(耳毛)과 耳道腺, 皮脂腺이 있으며 바깥쪽 3분의 1은 물렁뼈이고 안쪽 3분의 2는 딱딱한 뼈다. 이도선은 땀샘이 변형된 것으로서 끈적거리며 회갈색에 가까운 때, 귀지(earwax)를 만들고, 피지선은 반드르르한 기름기를 분비해 외이도가 마르지 않게 한다.

외이도는 전체적으로 봐 모래시계를 닮아 고막 근방은 약간 잘록해지면서 아래로 처진다. 강에서 첨벙첨벙 한참 미역감고나면(쑥을 손바닥으로 싹싹 문질러 꼭꼭 끼었지만) 물이 새들어가 거기에 흥건히 고여 귀가 꿀렁꿀렁, 멍멍해 머리를 젖히고 방방ㆍ길길이 뛰거나 툭툭 치며 버둥버둥 호들갑을 떨어보지만 끄떡 않다가 뒤늦게 저절로 뜨끈한 물이 주르르 홀랑 빠지는 것을 다들 경험했으리라. 어, 시원하다. 이제 살았다!

귀지는 외이도의 피부를 보호하고 먼지를 닦아내고 물이나 곤충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세균과 곰팡이를 죽인다. 그러나 너무 커지면 고막을 누르거나 외이도를 틀어막아 청각을 방해한다. 부득부득 귀지를 빼거나 물을 닦을 요랑으로 귀이개나 면봉을 자주 잘못 쓰면 괜히 귀지를 깊숙이 밀어 넣어 까딱 잘못하면 고막에 구멍을 낼 뿐더러 기름기만 말끔히 닦아내고 만다. 마냥 그대로 두는 것이 ‘無爲自然’이다. 만에 하나 상처가 나는 날이면 지독하게 낫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가렵다는 외이도 염증이나 귀진균증 같은 고질병에 걸린다.

귀지는 딱딱한 건성귀지와 지방기가 많고 갈색이며 눅진눅진한 습성귀지로 나뉘며, 동양인이나 인디언들은 건성이 많고 백인이나 흑인은 습성이 더 흔하다고 한다. 귀지는 외이도의 바깥 3분의 1 자리의 피지선에서 만들어지며, 그 60%가 케라틴, 12~20%는 지방산과 라이소임, 6~9%는 콜레스테롤 성분으로 귀지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 비듬이 늘듯이 귀지도 많아진다고 한다. 헌데, 다른 포유동물도 귀지가 생긴다고 하니, 일례로 이빨 없는 고래(baleen whales)는 귀지로 나이를 측정한다고 한다. 귀지 덩어리가 클수록 나이가 든 것이란 말 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사람 몸은 들여다볼수록 신비스럽다. 외이도가 스스로 청소를 하니, 귀지는 틀림없이 꼭 밖으로 밀려 나오게 돼 있단다. 입을 놀려 턱이 움직이면 죽은 상피세포나 귀지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손톱이 자라는 속도’로 바깥으로 밀려나온다. 거참, 신통하도다! 모름지기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니 내일 죽을 것처럼 억지로 귀지를 후벼 파내지 말라는 말씀.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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