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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적인 세상을 어떻게 건널까
이 산문적인 세상을 어떻게 건널까
  • 방민호 서울대· 문학평론가
  • 승인 2011.11.21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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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문학-시를 읽다

참 산문적인 세상이다.‘ 나꼼수’를 들으며 생각한 것이, 가히 풍자 시대라는 것이다. 오래 전에 황지우 시인, 김지하 시인 같은 사람들이 풍자적인 시를 썼다. 그후 풍자시는 사라져버리다시피 했다가 최영미 시인이‘돼지들에게’로 문단을 질색하게 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었다.

바야흐로‘돼지’와‘여우’의 시대였으니 세상도, 문단도 이 시인의 조소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문단을, 자기 길을 걸었다. ‘문학동네’, ‘창비’, ‘문지’의 3자 동거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시집 역시‘창비’,‘ 문지’의 두 시리즈로 내는 것이 문학적 우수성을 보증 받는 것처럼 여겨진다.

최근에 이 두 출판사에서 낸 시집들을 죽 일별해 보았는데 문제가 커 보였다. 우선 이 두 출판사는 최근 몇 년 젊은 시인들 시집을 다투어 내고 있는데, 이 노력은 과연 상응하는 결과를 얻었던가. 시 쓰는 일이 바이올린 연주나 색소폰 연주 같을 수야 없다. 그러나 여기에도 언어적 수련이 대단히 중요하다. 기교도, 생각도, 감정도 숙성되지 않은 시집은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젊은 시인들 내부에서 물이 차 넘치기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이 두 시리즈에 시집을 내온‘이름 난’시인들도 상당한 매너리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두 출판사의 시집 시리즈는 이 시리즈가 오래 지속돼 온 만큼 성과도 여전히 크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인맥이 난마처럼 얽혀버린 탓에 더 나은 시집들을 선별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면 그‘바깥’은 어떤가. 최근 몇 년 간 시집 시리즈를 내는 출판사가 아주 많아졌다. 누가 말했듯이 어느 아파트에 가서“시인!”하고 부르면 다들 몰려나오실 정도라고나 할까. 이것은‘시’의 대중화, 민주화다. 좋다. 그러나 무언가 좋다고 해서 그것이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책상 옆에 잔뜩 쌓아 올린 이 집 저 집의 시집들을 죽 둘러봐도 정말 좋은 시집 찾기가 힘들다. 세상을 가득 품에 안고 우는 시도 드물고, 세상의 한 모서리를 향해 진정한 야유를 보낼 줄 아는 시도 드물다. 많은 시집들에서 화자는 대부분 좁고 작은 울타리 속을 살아가며 그 안에서 얻어지는 감상을 노래한다.

요컨대, 과연 무엇이 시냐 하고 다시 물어봐야 할 때다. 시의 언어는 한‘고독한’개체로부터 발화되지만 삶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귀에 가득히 울려 퍼지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시는 넋두리도, 일기도, 잡문도 아니다. 시는 어쨌든 형식미학적으로 음악성을 견지해야 하며‘내용미학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체현해야 한다. 그 괴리의 고통을 노래할 때조차 동일화, 본질에의 향수를 함축하지 않고는 참된 시라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시가 좋아지려면 시인 자신이 툭 터져야 한다. 시인의 자아가 마음의 단단한 경계를 허물고 나와 세상에 스며들어야 한다. 세상이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천양희 시인의 시집『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그 권두시는‘들’이라는 작품인데, 여기에 그런 원리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필자의 생각이 이렇다 보니, 요즘 시집 읽는 재미가 참 덜하다. 백 권 시집을 뒤져 찾아서 겨우 몇 권을 얻는 정도랄까. 그 중에 요즘 판형이 달라진‘문학동네’시리즈 시집으로 이홍섭 시인의『터미널』이라는 게 있다. 시집 제목으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데, 책 안으로 들어가니 썩 좋다. 다음은 그 시들 가운데 하나인‘등대’라는 것이다.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 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 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무엇보다 시적인 정서가 살아 있다는 점, 시인이 행연을 자유롭게 움직일 줄 안다는 점, 마지막으로‘강원도’산골짜기 바다 세상에 깊이 스며들어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회한이 담겨 있다는 점 등에서 이 시는 아주 좋아 보인다.

논의 대상을 옮겨 보면, 먼 곳에서 부쳐온 시집 가운데 이달균 시인의『문자의 파편』이라는 게 있다. 짧은 시들이 좋은 것이 많다. 이 가운데‘몽돌 해변’이라는 시를 인용해 본다.

보아라
별들도 끝없이 죽음에 이르나니
한 평 하늘을 갖지 못했거나
끝내 못 이룬 것들이 그리운 별들은
떨어져 마침내 자갈동의 내를 이루는구나

이 시는 최근 시단에서 논의 되고 있는 최동호 교수(고려대)의 극서정시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이기도 한 최동호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극서정시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짧고 간결한 시다. 이러한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시단이 어지럽고 복잡한 언어의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생각, 간결하고 함축적인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을 것이다. ‘몽돌 해변’은 작은 몽돌에 세상을 담아 놓은 좋은 시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의 하나로서, 이경림 시인의‘飛翔’(시집『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이라는 작품이 있다.

비행기 속에는
이렇게!

                                       

웅크린 채 죽은 뼈다귀들이
떼를 지어
구름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떤가. 시를 어떻게든 새롭게 해보려는 안간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비록 시단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어지럽지만 제 갈 길 가는 시인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문학평론가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2007년 김달진문학상 평론부문을 수상했다. 저서로 『박태원 문학의 재인식』, 『파시즘 미학의 본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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