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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 쉴 틈 없는 방학 앞둔 여섯 교수들의 ‘즐거운 비명’
[테마] : 쉴 틈 없는 방학 앞둔 여섯 교수들의 ‘즐거운 비명’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6.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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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24 19:52:43
가르치랴 연구하랴 행정잡무에 시달리랴, 4개월간의 학사일정을 마치고 나면 교수들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친다.
따라서 두 달 간의 방학은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황금 같은 시간. 대부분의 교수들이 여행과 휴식의 단꿈을 꾸고 있을 때 휴식도 미뤄둔 채 학기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는 교수들의 여름을 미리 훔쳐보았다.

목숨 내걸고 ‘정동지킴이’로 나서는
김정동 목원대 교수(건축)

김정동 교수에게 올 여름은 다른 어느 해보다도 뜨거운 여름이 될 듯 하다. 그가 “목숨을 내놓고” 지켜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건축물을 허물거나, 유적지를 해친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곳이 대학이든 관공서든 어디든 달려가 ‘근대 건축의 지킴이’로 이름난 그가 이번에 목숨을 건 곳은 다름 아닌 정동. 서울의 오랜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정동은 건축사적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 곳이다. 그는 정동이 몇 달 전부터 외국 대사관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데다, 심지어 미국 대사관 아파트까지 짓는다는 흉흉한 소문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학기 중에도 정동 살리기 운동에 전념해온 김정동 교수는 ‘이번 여름을 넘기면 안 된다’는 각오로 방학을 온통 정동 살리기 운동에 바칠 생각이다.
정동도 지켜내야 하지만, 가을쯤 책을 내놓기 위해서 글쓰는 일도 게으름 피울 수가 없다. 아무리 풀어놓아도 끝이 없는 ‘근대 건축사’에 대한 내용으로, 이번에 펴내면 열 번째 책이 된다. 낮에는 정동을 뛰어다니고 밤에는 책상머리에 앉아 잠 못드는 여름밤이 계속될 듯하다.

연변 작가들과 함께 백두산 오르는
나희덕 조선대 교수(국문학)

대학에서 두 해째의 방학을 맞는 나희덕 교수의 여름은 연변에서 시작된다. 중국 연변대학에서 열리는 ‘한·중 수교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하기로 돼있기 때문. 일정은 7월 8일부터 1주일 동안이고, ‘창작과비평사’를 중심으로 많은 작가들 틈에 ‘묻어서’ 갈 예정이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심포지엄에서 ‘남한의 현대시’라는 주제로 간단한 발제를 하나 맡았는데, 내심 반가운 일은 연변 작가들과의 만남이다. 나희덕 교수가 이번 중국행에서 무엇보다 기대하는 것은 백두산에 오르는 여정이다. 백두산에 오를 생각으로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중국에 다녀온 뒤에는 자잘한 문학캠프들이 기다리고 있다. 시인으로 돌아가 독자들과 함께 문학으로 호흡하는 시간들인지라 웬만해서는 발을 뺄 수가 없다. 제일 목마른 일은 무엇보다 밀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다. 요즘 그를 사로잡은 주제인 ‘감각’에 대한 에세이를 풀어내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방학 동안 차분히 글을 쓸 수 있을 지 걱정이다.

일본 방방곡곡에 조선음악 울리는
노동은 중앙대 교수(한국음악)

워낙 바깥일이 많은 노동은 교수에게는 학기와 방학이 따로 없다. 6월 30일 원광대에서 열리는 한국무용학회 심포지엄 발표를 시작으로 8월까지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이다. 중앙대 한국음악과에서는 매년 여름방학 때 교수와 학생이 모두 참가하는 캠프를 여는데, 7월 1일부터 열흘 동안 여름캠프에 묶여 있어야 한다. 7월 중순에는 국악대학 건물 짓는 데 참고하러 일본 현지 조사를 떠날 예정이다. 또 한국국악학회, 음악학회가 함께 여는 통합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참석한다. 노동은 교수가 이번 여름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일은 8월부터 한달 간 일본을 방문하는 ‘조선통신사’ 행렬. 조선시대 통신사의 전통을 한·일 월드컵 기념으로 부활시킨 이번 방문에서 노 교수는 예술총감독을 맡았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여정을 따라가며 우리 음악을 일본에 알리는 뜻깊은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또 민족음악인협회에서 음악교사들 연수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주제는 ‘북한음악의 이해’로 북한과의 음악교류와 문화교류에 힘 쏟아온 노 교수가 빠질 수 없는 자리이다. ‘한국근대음악사’ 2권도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 이래저래 숨돌릴 틈 없는 방학이 될 듯 하다.

한국 영화의 든든한 ‘배후’역할 맡은
변재란 순천향대 교수(영화)

지금 변재란 교수의 일상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일은 영화진흥위원회 활동이다. 얼마 전에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이 된 탓에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영화 뒤에 영화진흥위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도 부담스럽거니와, 한국영화가 발전할수록 영진위의 할 일이 많아지는 탓이다. 영진위 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데, 자료 찾고 준비하는 데 며칠을 꼬박 바친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등 방학도 없이 영진위 활동에 매달릴 생각이다. 또 7월에는 쌓인 ‘빚’을 갚아야 한다. 학기 중에 여기저기서 들어온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방학으로 미뤄왔는데, 어느새 그 약속들이 발치 아래 산더미처럼 쌓였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섣부른 약속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8월쯤 되면 느긋한 마음으로 영화제에 참석할 수 있을 지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

한국 만화로 세계 만화 지형도 바꿀
성완경 인하대 교수(미술)

제 4회 광주 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아 몇 년 동안 열정과 노력을 광주에 쏟아 부은 성완경 교수는 유난히 국제행사와 인연이 많은 듯하다. 6월 29일, 석 달 간 빛고을을 달궜던 광주비엔날레가 폐막된 뒤에 쌓인 긴장을 풀 새도 없이 또 하나의 굵직한 행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 최고의 만화 축제인 ‘앙굴렘 만화페스티발’이 3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를 ‘영예초대국’으로 초청했고, 성 교수는 여기에서 앙굴렘에 보낼 작가와 작품, 프로그램들을 준비하는 중책을 맡았다. 내년 1월 마지막 주 닷새 동안 열리는 행사를 위해 성 교수는 여름을 꼬박 바쳐야 한다. 이달 말 1차 기획안을 만들고 7월초에는 유럽 출장을 다녀올 계획이다. 적어도 9월까지는 20여명의 작가를 선정하고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8월에 구체적인 윤곽을 그려낼 생각이다. 한국 만화를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를 그가 놓칠 리 없어서, 앙굴렘을 시작으로 유럽 대도시 순회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2004년 ‘한국만화역사전’, 2005년 한·중·일 3개국의 ‘동아시아 만화전’ 등 벌써부터 3년 뒤까지 계획이 잡혀있다. 앙굴렘을 계기로 그는 한국만화의 국제진출에 부쩍 욕심을 내고 있다. 한국문화컨텐츠진흥원과 손잡고 한국만화 해외 버전 제작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 오페라 부흥 위해 방학도 반납한
정은숙 세종대 교수(성악)

정은숙 교수는 당분간 방학 없는 삶을 보내야 한다.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맡은 뒤 그는 학교에 휴직서를 냈다. 학교생활과 오페라단 운영 두 가지를 함께 해나가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둘 다에 충실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다. 오페라단 단장으로 활동하는 3년 임기 동안 방학으로 재충전할 수 있는 느긋한 교수의 삶은 잠시 접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정은숙 교수는 지난 1월 단장으로 취임한 후부터 교수가 아닌 오페라단 단장의 삶을 살고 있다. 체계를 새로 꾸리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등 오페라단의 전체 윤곽을 그리는 일뿐만 아니라 공연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까닭이다. 4월에는 국립오페라단 40주년 기념 공연, 6월 ‘전쟁과 평화’ 공연으로 숨돌릴 틈 없었고, 가을 공연을 미리 준비하느라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방학 없는 여름을 보내는 것이 오랜만이라 낯설기도 하지만, 오페라단 부흥에 대한 사명으로 그는 피곤함을 잊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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