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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 대한 그리움
혼돈에 대한 그리움
  • 박순성/동국대·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2.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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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박순성/동국대·편집기획위원

자아의 발견은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 생각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 그러한 나를 비추는 의식, 의식의 무게를 다는 순수이성, 일상의 정신을 압축하고 왜곡하는 꿈, 긴 의자에 누워 결코 알지 못할 꿈을 털어 놓는 자신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나, 다시 생각에 빠져드는 나를 돌아보고 있는 나. 이 무한순환은 나를 우주의 중심의 던져놓았다.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우주의 중심에 던져진 나. 그런데 도대체 나의 존재는 이 우주의 어디로 들어왔기에, 나가지도 못하고 한없이 돌고 있는가.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린다면, 윤회의 고리는 끊어질 것인가. 너 자신을 버려라. 길이 끊어진 곳에서 자신을 잊어버려야 비로소 참된 나를 건질 것이다. 근대는 잃어버린 고대의 진리를 찾아가는 끝없는 에움길일 뿐인가.

고대의 진리는 아닐지라도, 때로는 아름다움이 나를 잊게 한다. 사월의 이른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의 연한 잎들이 내는 재잘거림, 한여름 저녁 높은 언덕에 앉아 기다리는 노을의 형언할 수 없는 빛깔, 따뜻한 가을 햇볕 속에서 바람에 날려 내려앉을 듯 다시 떠나가는 마른 꽃씨들, 닳을 대로 닳아버린 낙엽들이 여기저기로 휘몰려 다니며 겨울을 준비하는 빈 운동장, 이 모든 자연의 아름다움은 태어났다 사라지는 것들의 고귀함으로 나 자신을 잊게 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욕망은 나를 주체할 수 없게 한다. 천천히 감각의 마디마디를 깨우며 시간을 이기던 강인함을 나는 이미 빼앗겼다. 육체는 쉽사리 욕망에 굴복하고, 나이 든 몸은 오래가지 못해 마음을 지치게 한다. 게으른 정신은 변명을 찾기에 급급하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모든 것을 깨달은 양 뻔뻔스럽다. 진리에 대한 바람은 사라지고, 고개를 돌리면 사라져 버릴 짧은 기억만으로도 나는 떳떳하다.

그래도 한때 우리는 역사와 정의를 논하지 않았던가. 역사와 정의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자각은 또 다른 자아의 발견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고통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사사로운 개인을 버릴 때 더 큰 자아를 발견할 것이라고 외쳤다. 주변부의 세계질서에서 근대는 혼돈이었다. 그러나 분명 나는 있었다. 아름다움이나 그 무언가를 위해 잊어버릴 나는 적어도 존재했다.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소리도 쳐보고 박수도 치면서 축구를 보고난 밤, 나는 꿈속에서 온통 붉은 악마들과 놀았다. 나를 잊어버리라고 유혹한 악마가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에는 오랜 욕망에 지친 나의 낯선 얼굴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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