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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동향] ‘잡종’ 연구, 학제간 연구 틈을 비집고 들어오다
[학술동향] ‘잡종’ 연구, 학제간 연구 틈을 비집고 들어오다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2.06.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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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 연구, 기초부실 우려
과학자이자 문학가인 찰스 스노우는 이미 40여 년 전 ‘두 문화’에서 과학문화와 인문문화가 조화를 이뤄야함을 역설했다. 각 학문 사이의 심각한 단절이 학문 발전에 장애가 됨을 예견한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최근 한국 학계에서도 분과학문을 넘어서려는 논의가 점차 활발해 지고 있다. 학제간 연구 이외에도 연구자 개별의 관심에 따라 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이다. 기존의 분과학문이 순수 혈통을 고집했다면, 이제는 각 영역을 넘나드는 잡종학문이 시작된 것이다.

부정적인 늬앙스를 풍기던 ‘잡종(hybrid)’이라는 말이 생산적이고 변화무쌍함의 대명사로 부각된 것도, 한국 학계에서 잡종성 논의가 시작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실제로 이 용어는 홍성욱 토론토대 교수(과학사)가 1997년에 ‘잡종, 그 창조적 존재학’을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것에서 출발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문기사검색에서 잡종을 치면 ‘잡종개’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홍 교수는 “잡종학문은 학제간 연구일 수도, 각 분과 학문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잡종학문이었던 학제간 연구가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자리잡고, 또 다른 새로운 시도가 그 학문을 다시 잡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순종과 잡종의 변증법’이 그가 덧붙인 설명이다. 결국 “잡종성의 본질은 역동적인 변화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잡종학문은 변화를 꾀하는 새로운 시도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연구 단계로 볼 수 있다. 이후 또 하나의 학제로 정착될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신나는 실험 단계인 셈이다.

텍스트 확장이 학문의 확장으로

홍 교수는 “과학사 자체가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버둥대는 잡종같은 존재”라고 규정한다. 스스로를 박쥐같은 존재로 규정하는 그의 관심분야는 다양하다. 과학사를 공부했지만, 사이버 공간에서의 글쓰기 문제부터 언어, 여성, 사회의 문제까지 각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을 꾀하는 논의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백욱인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는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인터넷 문제의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인문학의 분야에서 과학을 텍스트로 가져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기 드물게 정보와 과학 기술의 사회학에 집중한다. 특히 사이버 공간 속의 사회학적 실천 문제가 두드러진 화두다. “‘후기자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정보자본주의’ 등의 서술적 용어가 아니라 현 사회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사회과학적 개념과 규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두 문화의 결합을 실천한 것이다.

포항공대의 과학문화 연구센터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과학사)를 중심으로 철학, 전자공학 전공 교수들이 모인 이들은 과학문화에 대한 역사적 관점 연구를 통해 과학기술과 발전과 역사에 올바른 이해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학문의 한 극단에 있던 과학이 스스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

또 하나 눈에 띄는 경향은 대중문화가 인문학의 주요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이분법을 많이 벗어났음에도 학계에서는 대중예술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러나 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는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이란 책에서 애니메이션과 철학의 관계를 논했다. 인문학자들이 애니메이션 콘텐츠 개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텍스트를 단순히 학문의 수단으로만 삼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생산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다 텍스트로 받아들이는 그에게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철학 담론이 아닌 생생하게 숨쉬는 문화가 이야기꺼리다.
이 뿐만 아니다. ‘한국대중가요사’를 쓴 이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원이나 다양한 대중 문화를 분석하고 예술로 규정한 박성봉 경기대 교수(다중매체영상학) 역시 학계의 통념을 바꾸었다. 특히 전통문화예술이 가지는 권위를 ‘품끼’로, 대중예술이 가진 통속적인 성향을 ‘뽕끼’로 규정하는 박 교수의 용어도 학적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그러나 이런 연구들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쉽게 나올 수 없었던 관점을 제안한다.

이처럼 학계에 일고 있는 잡종 연구 바람이 낳은 성과들은 재밌다. 기존의 연구 방식으로 가질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용석 교수는 이런 잡종 연구에 조심스런 우려를 표한다. “학제간 연구도 각 학문이 탄탄하게 쌓여있을 때 더욱더 그 성과가 뛰어날 수 있”고 “기초 학문이 바탕이 될 때 바른 연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백욱인 교수는 “학문의 텍스트가 다양해지고 그 범위가 확장되는 것은 반길 부분이지만, 그런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될지, 또 학문으로서의 깊이를 가질지 아직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잡종’의 개념을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잡종학문이 정확한 개념으로 정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홍성욱 교수는 “학제간 연구의 기반은 잡종적 시도였다”고 말한다. 잡종연구가 가지는 창조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잡종 연구, 기초 부실 우려

인물 데이터 베이스를 검색해 보면, 학교에 소속돼 있는 연구자는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왕성한 활동을 할지라도 소속이 없는 연구자들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자신의 범위를 대학과 연구소에만 한정시키는 학계의 경직성을 보여 주는 단편적인 사례다. 학계와 문화 담론에서 스스로 잡종임을 인정하고 말하려는 시도는 계속되는 가운데, 순종보다 찬란한 잡종이기를 바라는 움직임이 보수적인 학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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