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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의 향기 … 현대발레와 고전 명작이 만났을 때
고품격의 향기 … 현대발레와 고전 명작이 만났을 때
  • 교수신문
  • 승인 2011.11.0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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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로미오와 줄리엣」재해석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재구성한 현대발레「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작의 큰 흐름은 그대로 따라가면서,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에 세련미가 더해졌다. 순수·청순함을 벗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날 수 있다. (사진제공=국립발레단)
1962년 창단된 국립무용단(예술감독 최태지)은 우리 무용계의 비약적인 발전에서 가장 주요한 일임을 다해왔다. 예술적 수준과 대중적 수용력을 높이는데 최일선에서 기여해온 것이다. 20세기 후반을 숨 가쁘게 뛰어왔다고 한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재단법인化돼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예술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세계 수준에 바싹 다가가고 있다고나 할까.

여러 가시적인 성과들 중에서도 단연 레퍼토리의 다양화와 세련미는 두드러진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등의 고전발레뿐 아니라 유리 그리가로비치의「스파르타쿠스」, 롤랑 프티의「카르멘」과「젊은이와 죽음」, 보리스 에이프만의「차이코프스키」,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로미오와 줄리엣」과「신데렐라」등의 현대발레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올해 가을을 빛낼 레퍼토리로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로미오와 줄리엣」을 지난달 20~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 올렸다.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로미오와 줄리엣」은 1996년 몬테카를로발레단에 의해 초연됐다. 2000년에 국립무용단에 의해 국내 초연된 바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월리엄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작곡으로 유명한 발레「로미오와 줄리엣」은 마이요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졌다. 원작의 굵직한 흐름을 따라가는 가운데, 인물의 세부 묘사와 표현적인 춤 사위에 있어서 현대적인 재해석과 재구성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변치 않는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러브스토리

굵직한 전개의 틀은 기존의 스토리를 따라간다. 하지만 각색된 부분의 개성도 분명하다. 베로나의 두 명문으로 오래된 앙숙관계에 있는 몬테규家와 캐플렛家의 젊은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노려보고 싸우기 일쑤다. 그리고 두 가문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나선 로렌스 신부로 인해 결국 한 연인의 비극이 야기된다.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는 기존作들에 비해 여기서의 로렌스 신부는 사건을 이끄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로렌스 신부에 의해 우연찮게 만나게 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신들의 운명대로 빠져든다. 유명한 발코니 신에서 두 남녀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십대의 풋풋한 밀회를 그려낸다. 순수하고 솔직하면서도 끈적거리고 장난스럽기까지 한 사랑의 듀엣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로렌스 신부의 주례로 비밀 결혼식까지 올리게 된다.

하지만 몬테규家와 캐플릿家의 젊은이들의 혈기왕성함은 예기치 않은 사건을 양산한다. 줄리엣의 사촌인 티볼트가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를 죽을 정도로 다치게 하고 로미오는 보복으로 티볼트를 죽이게 된다. 다시 만난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사건으로 갈등을 겪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장면을 매듭짓는다.

이제 그 유명한 종결로 치닫는다. 약혼자 파리스와의 결혼을 종용받는 줄리엣은 로렌스 신부의 계획으로 假死상태에 놓이게 되고 내막을 알지 못한 로미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다시 깨어난 줄리엣 역시 절망 속에서 로미오를 따라가면서 막을 내린다.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큰 틀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적인 면으로 들어가 보면 여러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국립발레단
안무가 마이요의 예리한 인물탐구

전반적으로 원작의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에 큰 변화를 읽기 힘들 수도 있으나, 등장인물의 세부적인 성격 묘사에 있어서는 색다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로렌스 신부는 두 가문의 오랜 분쟁을 희석시키고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조장하는‘운명의 집행자’였으나 결국 꼬여가는 상황에서 실타래를 풀어주지 못한 채 비극적인 결말을 방관한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복사들은 인간 내면의 선악 같은 양면성 혹은 심리적인 갈등을 춤으로 묘사한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상징하는 무용수들의 등장은 대단히 현대적인 해석이다.

로미오를 필두로 두 가문의 젊은 남자들은 주체 못하는 혈기왕성함으로 사고를 야기한다. 적대적인 충돌은 유혈사태를 일으킨다. 이러한 결과에 당황하면서도 아닌 척하는 모습은 굴곡된 강함의 표출이다. 또 즉각적으로 보복을 위해 달려듦으로써 사태를 더욱 크게 벌여놓기도 한다. 신체적으로는 성인과 비슷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십대들의 행동들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줄리엣은 원작에서보다 훨씬 자의적인 행동양식을 보이는 소녀로 바뀌어져 있다.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인데, 그로 인해 이따금씩 말괄량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안무가 마이요의 예리한 인물탐구는「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기존작의 재해석에서 그만의 창의성을 발휘한 결과다. 춤의 기교성에 집중하기보다 내용적인 면에 충실한 표현적인 움직임으로 작품을 이끌어간다. 작품의 주제에 맞는 전개, 즉 작품성을 중요시하는 현대발레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젊은 남자들의 무모함은 큰 동선의 강한 움직임으로 표현되고, 두 연인의 밀회는 순수한 열정을 담은 이인무로 그려진다. 특히 머큐쇼를 피격하고 도망치는 티볼트와 광분에 차 그를 뒤쫓는 로미오는 급박한 상황을 슬로우 모션으로 그린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연출을 움직임으로 실현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어 서로 엉켜서 치고 박는 모습 또한 연기적 요소를 담은 움직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춤은 국립무용단의 숙련되고 열정적인 무용수들에 의해 적절하게 실현됐다. 27일 공연의 경우 김주원(줄리엣), 이동훈(로미오), 이영철(로렌스 신부), 윤혜진(캐플렛 부인), 신승원(유모) 등의 무용수들이 새롭게 단장된 마이요의 춤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단순한 세련미가 돋보이는 미니멀한 무대장치, 고전과 현대의 미를 조합한 의상, 무엇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까지 가세해 춤에 더할 나위 없이 힘을 실어주었다.

국립발레단에 의해 공연된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로미오와 줄리엣」은 하나의 고품격 현대발레 레퍼토리였다. 이는 국립발레단을 넘어 우리 무용계의 춤 역량을 가늠케 하는 성과로 여겨질 수 있다. 1세기도 안 되는 시기 동안 세계 수준에 근접한 우리 무용계의 실현 능력 말이다.

심정민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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