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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생활과 연구를 위협하는가 … 정부 예산삭감 철회 일등공신은 ‘보고서’
무엇이 생활과 연구를 위협하는가 … 정부 예산삭감 철회 일등공신은 ‘보고서’
  • 임동욱 사이언스타임즈 기자
  • 승인 2011.11.08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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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과학자들이 길거리로 나선 이유

 

지난 9월 8일, 영국 과학자들은 한숨과 분노에 휩싸였다. 빈스 케이블(Vince Cable) 산업경제장관이 내년도 과학기술 관련예산을 25퍼센트 이상, 많게는 40퍼센트 가까이 삭감하겠다고 발표하며“돈이 되지 않는 연구는 그만두라”라고 종용한 것이다. 특히“과학자의 절반이 세계 수준에 못 미친다”라는 지적에 많은 연구자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결국 보다 못한 과학자들이 길거리로 나섰다. 지난달 9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도 2천여명의 과학자들이 런던의 영국 재무성 앞에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항의서한에 서명한 사람만 3만3천명에 달했으며 그중에는 하원의원도 11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과학자들은 트위터로 상황을 알리며 참여를 촉구했고, 중년의 연구자들도 사회적 인맥을 활용해 100여 건의 신문기사와 뉴스 보도를 이끌어냈다.

유명 과학자들의 지지성명도 잇따랐다. 이들은 과학과 경제성장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영국 왕립학회를 이끌고 있는 마틴 리스(Martin Rees) 경은“과학관련 예산이 삭감된다면 탁월한 연구결과도 사라져 국가경쟁력이 저하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영리기구인 과학·공학진흥운동(Case)을 운영하는 임란 칸(Imran Khan)도“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과학기술 분야의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국 지난달 19일 영국 정부는 예산 삭감안을 철회하며 한 발 물러섰다.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삭감이 아닌 절감을 통해 효율을 높이겠다”라고 발표하며“영국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 리더이며, 과학은 미래 성장동력에도 필수적”임을 인정했다.

‘과학은 필수다’의 보고서 1만7천여 명 지지서명

비영리단체‘과학은 필수다(Science Is Vital)’가 지난달 5일 발표한 보고서야말로 영국 정부의 예산 삭감 철회발표를 이끌어낸 일등공신이랄 수 있다. 영국 전역의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공개 설문조사를 실시해 160개 과학기술 단체와 과학자 744명의 답변을 받아 정리한 문건이다. 보고서의 제목은「영국의 과학 관련 직업은 통제불가능한 위기에 처했나?(Careering Out of Control: A Crisis in the UK Science Profession?)」로, 과학자들의 시위가벌어진 다음날 영국 정부에 전달됐다. TV다큐멘터리로 이름을 떨친 물리학자 브라이언 콕스(Brian Cox), 과학관련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천문학자 패트릭 무어(Patrick Moore) 등 대중 인지도가 높은 과학자를 비롯해 1만7천여명이 지지서명을 했다.

아이디어는 지난 5월 24일 개최된 토론회에서 출발했다. 데이비드 윌레츠(David Willetts) 교육과학장관, ‘과학은 필수다’의 설립자이자 대변인인 제니 론(Jenny Rohn) 등이 패널로 참가해 대화를 나누며 7개의 과학기술계 이슈가 모였다. △교육투자에 비해 급여가 낮다 △일자리를 따라 자주 이사한다 △영구직이 줄어들고 단기계약이 늘어난다 △가족부양과 인간관계 유지에 집중할 수 없다 △정규 코스를 밟지 않은 이들을 차별한다 △연구결과에 대한 압박이 크다 △젊은 과학자는 지원금 따내기가 어렵다 등이다.

윌레츠 장관은 론 대변인에게 자세한 자료를 요구했고,‘과학은 필수다’운동본부는 9월 한달 동안 공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반응은 놀라웠다. 설문을 시작한지 하루만에 400건의 의견이 접수되었으며 최종적으로 744명의 답변서가 채택됐다. 보고서는“과학기술은 국가경쟁력과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존재”라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영국은 과학의 발전과 산업의 발전 덕분에 역사적으로 많은 이득을 누려왔으며 생산성과 효율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취약한 직업구조 때문에 과학기술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영국 전역의 과학기술인이 답변한 내용이 소개됐다. 앞서 논의된 7개 이슈를 중요도에 따라 재배치하라는 질문에는 △짧은 계약기간 △낮은 급여 △잦은 이사 △가족과 인간관계의 어려움 △비정규 코스 출신 차별 △연구 결과의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재정 자립도 순으로 답했다.

과학관련 직업상황의 문제점을 묻자 432명 중‘고용안정성’을 언급한 비율이 67퍼센트에 달했다. 단기계약직이 늘어나 생활고와 불안감에 시달려 연구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과학자들이 단기계약직이라는 가느다란 줄에 의지해 불안한 생활을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경력 누적’을 언급한 이들도 37퍼센트나 됐다. 단기 프로젝트에 따라 소속연구실을 자주 바꾸다 보니 승진 기회도 줄어들고 일관된 경력을 쌓기도 어렵다는 하소연이다. 30퍼센트는‘연구결과’를 걱정했다. 논문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평가점수가 낮아져 부담감도 커진다.‘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불만도 25퍼센트나 됐으며,‘ 나이가 적어 차별을 받는다’고 대답한 과학자들도 15퍼센트를 차지했다.

소속과 나이를 밝힌 676명 중에는 박사후연구원이 40.9 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21.8퍼센트, 전문연구원이 19퍼센트였다. 나머지 18.4퍼센트는 박사학위 비소지자, 과학기술계 단순종사자, 비과학자 등이었다.

이외에도 “박사학위자를 양성하려면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데도 경력자를 내몰고 신입 단기계약직으로 충당해 교육과 훈련을 반복하니 경제적 낭비다”, “ 과학기술 관련예산이 줄어들어 미국, 독일, 프랑스, 호주, 중국, 인도, 싱가폴 등 외국으로 이주하는 연구자가 많다”, “ 몇년마다 이사를 다녀 자녀교육과 가정생활 유지에 힘이 든다”, “ 경력이 늘어날수록 보수가 높아져 장기계약 가능성이 낮아진다”등의 의견이 있었다.

보고서는“젊은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려 전체적인 직업구조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바람직한 직업구조는 전문계층, 중간계층, 신입계층순으로 인원 비중이 늘어나 피라미드형을 이룬다. 그러나 현재 영국의 과학관련 직업구조는 신입과학자들의 지원이 적고 중간계층의 일자리가 줄어 막대기처럼 가느다란 수직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직업구조 안정시켜야 과학기술 발전 가능

‘과학은 필수다’운동본부는 지속적으로 개선시켜야 할 7개 사항을 제안했다. 첫째, 연구책임자와 연구임원을 제외한 연구진 인원들의 고용안정성을 보장한다. 둘째, 박사후연구원이 독립연구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지원해주는 예산을 늘린다. 셋째, 고연령 박사후연구원이나 정식코스를 밟지 않은 과학자들을 차별하는 채용기준을 폐지하고 독립 연구지원금을 늘린다.

넷째, 유명 과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배정되는 연구지원금 규정을 재조정해 박사후연구원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도록 한다. 다섯째,과학기술 관련 직업구조와 지원예산을 논의할 때 신입 연구원과 중견 과학자도 합석시켜 의견을 수렴한다. 여섯째,과학자 양성을 위해 민간 부문에도 지원금을 배정한다. 일곱째, 박사학위 소지자와 박사후연구원을 대상으로 직업 관련 상담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자신의 속한 직업군의 구조가 안정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5퍼센트에서 40퍼센트의 예산이 삭감되는데도 성장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분야도 드물다. 영국의 과학자들은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비극을 막아냈다. 소셜네트워크와 항의시위로 불만과 고민을 표출했을 뿐만 아니라 설문조사와 토론을 통해 의견을 취합하고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올바른 정책을 수립해서 미래의 희망을 지키려면 소수의 분노뿐만 아니라 다수의 동의와 공감이 필수적이다.

 

임동욱 사이언스타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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