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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미술의 화두가 된‘인간’… 한국미의 재구성은 지금 진행 중인가
전통미술의 화두가 된‘인간’… 한국미의 재구성은 지금 진행 중인가
  • 홍지석 미술평론가
  • 승인 2011.10.31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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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의 세 가지 풍경_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리움의 기획전

전시에 관한 한 올 가을 우리 전통미술의 화두는 단연‘인간’이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의 올 가을 대표 기획전은‘초상화의 비밀’(9월 27일~11월 6일)이다.

박물관 측에 따르면‘초상화의 비밀’전은‘초상화’를 본격 조망한 전시로는 1979년 이후 32년 만에 열리는 뜻 깊은 전시다. 여기에는「태조 어진」,「 윤두서 자화상」,「 서직수 초상」,「 황현 초상」,「 이쾌대 자화상」등 장르와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들이 다수 포함돼 있을 뿐 아니라「계월향 초상」, 「한국인의 초상」(루벤스), 일본 덴리대도서관 소장「초상모음」등 쉽게 접하기 힘든 화제작들이 두루 망라돼 있다. 또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도 인물을 다뤘다. ‘풍속인물화대전’(10월 16일~10월 30일)이 바로 그것. 안견부터 김은호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화가 52명이 그린 인물풍속화 100여 점을 모았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18~19세기 인물풍속화들. 특히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된 작품은 오랜만에 일반에 공개된「혜원전신첩」,「 미인도」를 위시한 혜원 신윤복의 인물풍속화다. 앞의 두 전시가 장르로서 초상화 내지는 인물(풍속)화에 집중한 경우라면 삼성미술관 리움의 기획전‘조선화원대전’(10월 13일~2012년 1월 29일)은 예술가집단인 畵員에 집중한 경우다.

이 전시는 도화서 소속 화원화가들이 왕실과 조정의 각종 繪事에 참여해 남긴 공적 작품들 외에도 私家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감상화들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화성능행도 8곡병」,「 동가반차도」,「 강산무진도」같은 대작들 외에도 일본 야마토분카칸 소장「운산도」(이장손, 서문보, 최숙창, 15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유묘도」(장승업, 19세기) 등 중요하지만 접하기 힘든 작품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미술관 측에 따르면 이 전시의 기획의도는“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던 화원화가들의 미의식을 조명하는 것”이다.

돋보기 또는 갤럭시탭을 통한 이미지 전달

‘인간’을 조명한 이 세 전시의 공통점을 찾아보기로 하자. 먼저 이 전시들이 긴 시간에 걸쳐 자신의 주제를 공들여 세세히 묘사하는 화가의 능력과 성실성을 예찬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즉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하나 같이 빼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당대 테크니션들의 걸작들이다. 그것들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잘 그린 그림이다.

예컨대“한 획,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가히 그 사람을 寫했다 한다”라고 했던 이하곤의 말대로 초상화(인물화)의 근본적인 매력은 대상 인물과 이미지의 닮음, 그 극도의 사실적 표현일 것이다. 윤두서 자화상 또는 신윤복 미인도의 매력, 그것은 무엇보다 극히 섬세하게 묘사된 세부다. (미인도에서) ‘가체의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묘사한 공력’앞에서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세부 묘사의 절정은 역시「화성능행도」나「기로세연계도」(김홍도)처럼 제한된 화면 안에서 다수의 인물을 등장시키되 개개 인물들의 세부와 생동감을 잘 살린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을 즐기는 최선의 방법은 돋보기를 들고 그 세부들을 곰곰이 살펴보며 그 묘사력, 그 정성스러운 필치에 감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미술관에서 처럼 그 돋보기는 지금 현대적 기술-갤럭시탭과 고해상도 모니터를 활용한 인터랙티브 장비-와 결합해 좀 더 생생하고 선명한 세부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 모두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땀 냄새를 물씬 풍기는’작품들이다. 그것들은 일필휘지하는 통찰, 과감성과는 다른 수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즉 관객들은 그에 투입된 시간과 땀, 구성의 밀도에 압도된다. 이러한 작품은 특히 질적 가치와 양적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거나 양적 가치를 보다 중시하는 사회에서 힘을 발휘한다. 가치를 미루어 짐작하기보다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를 원하는 사회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위 세 전시가 추구하는 방향은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 섬세한 세부 묘사가 중시되는 최근 우리 (현대)화단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러한 접근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이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 이래로 통용되는 한국미의 표준 -이를테면‘담박’,‘ 소박’,‘ 무기교의 기교’같은 가치들-이 무의미해지는(아니면 적어도 의문시되는) 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한국미라는 것은 고정된 가치라기 보다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재구성될 수 있는 가변적 가치일지 모른다. 이들 세 전시는 그러한 재구성이 지금 진행 중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올 가을‘인간’을 다룬 기획전시의 기획과 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은 전시에서‘스토리텔링’의 측면이 부각돼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이 전시들에는 작품들로부터 이야기를 이끌어내 서술적으로 풀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먼저 삼성미술관 전시를 보자. 이 전시는 화원화가들의 그림을 왕실회화(1부)와 일반회화(2부)로 나눠 보여준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는 화원 화가의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된다. 왕실 도화서의 안과 밖에서, 또는 주문자의 요구와 자신의 예술적 욕구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던 말 그대로의 화가-예를들면 극도로 치밀한 세부묘사를 자랑하지만 동시에 담백한 문인 화풍을 잘 소화한 김홍도-말이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문인화풍’,‘ 화원화풍’이라는 범주적, 개념적 틀 내부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던 개개 화가들의 일상적 스토리, 예술적 진면모를 주목하게끔 하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스토리텔링 전시와 관객의 작품 해석


스토리텔링의 측면이 보다 중요한 전시는 물론 초상화 내지는 인물풍속화를 주제로 내건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다. “그들은 그것을 작품으로 완상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그려져 있는 인간을 보았다” 는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의 지적을 감안하면 초상화(그리고 인물풍속화) 전시에서 그려진 인물과 연관된 사연, 사건, 이야기들을 강조하는 접근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온도차가 있다. 간송미술관이 여전히 양식적 배치를 중시하면서 제화시를 부각시키는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작품과 관련된 스토리를 부각시킨 경우라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기획 자체에서 스토리텔링을 전면적으로 내건 경우다.

이 전시는「하여가」와「단심가」의 두 주인공 이방원과 정몽주의 초상을 나란히 놓거나(그 옆에는 신숙주의 초상이 있다), 사명대사와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초상을 나란히 놓거나, 오성과 한음의 초상을 나란히 놓는 방식으로 작품에 연관된 온갖 이야기들을 전시에 덧붙인다. 절정은 루벤스의「한국인의 초상」옆에서 상영되는 영상 작업이다. 이 영상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에 끌려간 주인공이 유럽에 가서 루벤스를 만나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이 영상의 말미에 3D의 입체적 인물로 재탄생한 주인공은 이렇게 외친다.“ 나는 낯선 땅,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 사람이요.”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가 택한 스토리텔링의 방식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내러티브를 이끌어내는 최근 문화산업의 일반 경향에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접근은 관객의 호기심과 흥미, 참여도를 높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도한 도식화로 이어져 역사적 인물들과의 생생한 만남을 저해하는 것은 문제다. 루벤스 그림에 묘사된 한국인이 낯선 땅,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오히려 그는 낯선 땅,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이지 않은가.

과도한 도식화의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전시 리플렛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 곧“초상화에 그려진 사대부상은 하나같이 엄숙하고 위엄있는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어 서양 초상화에서 보이는 개성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이 구절은 전시에 소개된 개개 사대부 초상화의 갖가지 양상들을 획일화하는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 초상(인물)화의 양상을 너무 쉽게 단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뒤러나 렘브란트, 반 고흐의 인물화가 모든 맥락으로부터 단절된 알몸의 요소을 강조하는 반면 조선시대 초상화는 전형성, 곧 보는 사람이 기억하고 숭배하고 존경하고 싶은 가장 바람직한 성정의 표현에 가깝다는 설명은 전체적인 문맥에서 맞는 말일 수 있지만 개개 작품들의 감상에서 쉽게 관철될 수 있는 보편적 교리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리플렛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인 양 어색하게 전시에 끼어든 서양 초상화 1~2점(여기에는 꽤 잘 그린 프란츠 할스의 그림이 포함돼 있다)은 참으로 어색하다. 이렇게 본다면 국립중앙박물관의 기획 전시는 전시가 어느 정도까지 관객의 작품 해석에 관여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사례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 초상화, 인물화, 풍속화는 당대에는 현실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은 생생하고 사실적인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것은“한 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멸하여 사라진”어떤 것이다. 화원화가들의 그림은 한 때 살아 움직여 그 그림을 그렸으나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흔적이다. 그들은 덧없이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 영구한 것, 불변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덧없음을 느낄지 모른다. 이것은 낙엽이 하나씩 떨어지는 가을의 절정기에 전시장을 나오며 했던 생각이다.

홍지석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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