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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생명과학과 윤리 문제
[진단]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생명과학과 윤리 문제
  • 교수신문
  • 승인 2002.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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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24 18:36:10
과학기술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가 이제는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사회 이슈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생명과학기술과 관련해서는 윤리의 문제가 늘 따라다닌다. 정부부처 산하의 위원회나 연구소에서 제출되는 ‘생명과학 안전 및 윤리에 관한 법률’이라든지, ‘생명윤리기본법’을 둘러싼 공청회, 칼럼 등을 통해 불거져 나온 각계의 태도라든지, 최근의 생명과학 연구 결과에 대한 보도가 단신으로 그치지 않는 현상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생명윤리학회는 만 4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이지만, ‘생명 윤리’라는 분야는 더 이상 일반인들에게조차 낯설지 않게 됐다. 직접적으로 과학기술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이 과학기술의 윤리적 측면을 문제삼게 된 데에는 20세기 후반 생명과학기술이 거둔 혁혁한 전과가 작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명 윤리에 관한 담론이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생명윤리에 관한 논의 혹은 논의 구도 자체가 찬반논쟁으로만 비화되는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음을 비판하는 입장도 조심스럽게 제기할 수 있겠다. 생명공학의 윤리적인 쟁점이 제기될 때의 언론 보도는 ‘종교·여성계는 배아 복제 연구 반대, 과학계는 찬성’, ‘생명의 존엄성인가, 연구의 자율성인가’하는 식으로, 쟁점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논의 구도 속에서는 쟁점의 다양한 스펙트럼이나 쟁점들이 제기되는 정작 중요한 맥락은 간과되게 마련이다. 사실 한 단계만 들춰본다면, 과학-기술-의료계 내에서도 불임학회, 가축번식학회, 수정란이식학회, 발생생물학회 등이 배아복제 연구를 찬성하는 반면, 과학, 기술, 의료계 전체를 대변하는 학회들은 별다른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고, 개별적으로는 현재의 생명공학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과학계 내부에서 적지 않다. 물론 배아복제 연구를 반대하는 진영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관점에서 출발한다.

‘제한적 줄기세포 연구 허용’ 여부를 놓고 ‘배아 복제 실험을 제한하는 것은 생명공학을 말살하는 처사’라는 입장과, ‘비록 한시적·제한적일지라도 배아 연구를 허용하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입장이 대립하는 속에, ‘여성의 경험’은 사각지대에 방치됐다는 시각이 여성주의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령, 지난 1월 보건복지부의 생명과학 안전 및 윤리에 관한 법률 시안에 대한 ‘생명공학 감시를 위한 여성·환경단체 준비모임’의 성명서의 문제제기는 이른바 ‘잉여 배아’에 대한 여성의 입장을 보여준다. 성명서는 한국의 “수많은 불임클리닉이 과배란을 유도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잉여배아가 생산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며, “법률의 최종 시안이 여성의 입장과 경험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이런 문제는 과학기술부가 올 9월 정기국회에서 상정할 생명윤리 관련 법안이 바탕하고 있는,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생명윤리기본법 시안(2001년 5월)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시안은 대체로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바 있다. 물론, ‘과학계’는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불임치료를 목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냉동 배아 중 폐기를 앞둔 것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허용”한다는 대목은 ‘여성의 경험’에 기반 한다면, 여전히 논란이 될 수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 연구회(www.freechal.com/sts) 게시판에서도 이런 논의가 있었던 적이 있다. 이 연구회의 하정옥 씨에 의하면 “현재 ‘여성의 몸이 망가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 불임클리닉의 불임치료가 과연 ‘치료’인지 기술의 적용인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으며, 잉여배아란, 불임치료의 명목으로 난자적출과 호르몬 요법을 사용해야 얻어질 수 있음이 감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과학의 연구윤리나 생명윤리에 방점을 두는 진영의 ‘윤리’ 역시 구체성을 담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필요가 있다. 추상적 수준의 인간의 존엄성만이 생명윤리를 바라보는 시각 전체로 이해될 때, 생명윤리관련 법안을 둘러싼 진통 역시, 추상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생명 윤리와 관련된 구체적인 쟁점들을 더욱 다양하고 구체적인 관점들을 통해 조명해야 할 때이다.

박소연 객원기자 shant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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