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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_ 현대미술사학회 '아시아 현대미술의 현재와 미래' 국제심포지엄
학술대회_ 현대미술사학회 '아시아 현대미술의 현재와 미래' 국제심포지엄
  • 교수신문
  • 승인 2011.10.2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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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토) 이화여대 국제교육환 LG컨벤션홀에서는 흥미로운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리고 있었다. 현대미술사학회(회장 전혜숙 이화여대)의 ‘아시아 현대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 제12회 국제 학술심포지엄이었다.

전혜숙 학회장은 “아시아 현대미술의 현 상황을 냉철한 시각으로 점검하고자 했다”라고 말하면서, “아시아 현대미술이 글로벌 세계 속의 다중적이고 다가치적인 정체성을 어떤 방식으로 발언, 해체, 혹은 타협해 왔는지를 다각적으로 고찰한 게 성과”라고 밝혔다. 우물 안 개구리식 접근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서 아시아 미술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참여자의 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존 클락 호주 시드니대 교수는 「아시아의 현대성: 아시아 미술의 동시대성 고찰」을, 이구 토론토대 교수는 「차이 궈창의 '농부 다 빈치'와 트랜스내셔널 미술의 (비)가독성」을, 히로코 이케가미 일본 고베대 교수는 「일본 네오-팝의 승리: 역사적 평가」를 발표했다. 소날 쿨라 워싱턴대 교수는 「페미니스트 형식과 국제전 및 탈식민주의 시대의 여성 예술가」를, 브라이언 마이어스 동서대 교수는 「북한 미술, 외래문화의 유입에 대응하다」를, 진휘연 성신여대 교수(동양화과)「한국 현대 여성작가들과 새로운 정체성의 발견」을 각각 발표했다. 정체성의 모색을 화두로 한 진휘연 교수의 글을 발췌, 요약했다.


서구에서 배양된 이론은 차이의 많은 기호들을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현대미술의 다양한 지역적 기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양혜규의 작품 「 맬랑콜리 래드에 대한 그리움(Yearning  Melancholy Red)」에 대해 서구 비평가들은 흔히 감각과 공간에 대한 이해나 서구 추상표현주의의 색감이나 옵아트(Op art)와 연결시켜 논의했다.

양혜규 작품에서 한국인들의 기억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블라인드와 유사한 기능을 했던 한국 전통의 발(screen)이다. 가로 약 1미터, 길이 약 1.5미터의 발은 블라인드와 크기나 기능, 형태가 매우 유사한데, 보통 문틀이나 횡으로 놓인 보에서 아래로 드리웠다. 발은 햇빛을 막아주는 스크린이자, 바람과 공기를 투과시키는 개방형 창의 역할을 했다. 햇살과 광선, 온도, 바람, 습도, 공기, 냄새와 열 등의 흐름을 막지 않고 유통시킨다. 발이 공간을 막고 나누지만 부분적이며, 오히려 구획과 연합이 동시에 가능한 특이한 기능을 갖는다. 발은 문도, 창도 아니면서, 각 공간 간의 독립성과 연합성, 통합성을 모두 갖게 해주는 존재이다.

구정아·양혜규·니키리의 다중성

창호지를 바른 문이나 내려진 발은 모두 실내 안쪽의 풍경을 가려주지만 완전히 폐쇄하지 않음으로써, 유예적인 상태를 견지한다. 발이나 한지는 구분과 연합, 통일과 분리를 공존시킨다. 바람이 불 때, 발이 흔들리고, 광선은 발을 지나면서 약해지거나 쪼개진다. 감각은 시각적이기보다는 오감을 자극한다. 막혀있지 않은 공간, 막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가옥의 부분들을 통해 양혜규는 경계, 범위, 테두리, 등의 문제를 새롭게 보고 있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전통 가옥처럼 외부의 여러 요소들로부터의 완전한 폐쇄나 차단이 아닌 끊임없는 자극을 허락한 상태의 연장처럼 보인다.

구정아, 양혜규, 니키리는 각각의 방식으로 영역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미술사조부터 재료, 공간, 감각, 정체성 등, 경계와 범주, 그리고 속성간의 모호한 관계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마치 21세기의 복합적이고도 숨어버린 정체성처럼 작품 속의 여러 경계들은 모호하다.

정체성은 동일성의 모순위에 차이를 상정하고, 차이는 통합성, 투명성을 통한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에서 배태된 권위를 성취하는듯 하다. 구정아, 양혜규, 니키리의 작품들은, 20세기 서구이론의 탈구조주의적 해법이 남겨둔 그림자에 숨은 난제중 하나를 드러내준다. 이들은 다중적이다. 이들은 사물, 관계, 형태, 등을 섞고, 바꾸고, 병치하고, 전복했다. 외형적으로는 바바의 양가성, 혼종성 개념과 유사하다.

그런데 한국 문화에는 서구의 양가성(ambivalence)과 다른, 상반된 양쪽이 동시에 모두 가능한 (ambi-existing) 양가성이 있다. 상대개념을 반박하거나 상반되지 않는, 대립항 없는 상반의 공존이다. 서구의 양가성은 모순을 전제한 다른 것 간의 동시성이지만, 한국의 양가성은 상반되고, 서로 모순되지 않게 공존하는 포용의 이중성이다. 공간을 통합하고/구분해주는 발이나, 빛, 바람, 공기, 소리를 차단하고/전달해주는 한지를 통해서 외적 요소에 열려있는 탈-경계적 상태를 이 문화권은 오랫동안 경험해왔다.

동일성을 대체하는 한국 작가들의 정체성

격리보다는 공존을 전제로 한 차이의 존재는 반규정을 지향한다. 이점이 동일성을 대체하는 한국 작가들의 ‘정체성‘의 한 특징이다. 양혜규 뿐 아니라, 구정아, 니키리도 경계의 존재를 각자의 방식으로 거부함으로써, 구분되기보다는 열리고, 통합된 섞임의 시각을 지향해왔다. 현대 한국 작가들은 ‘규정하기 어려운’ 범주에 대한 서구의 인식론적 전제를 넘어설 수 있는 동시다발적 탈-경계성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이는 상반되어 보이는 요소의 긍정적 동시성을 이루어낸다. 한국 가옥처럼 한국 문화는 외부의 것과 나에 대한 뚜렷한 경계, 범주, 구분의 존재를 의심한다. 외부의 자극은 언제나 존재하며, 내부로 들고난다. 다만 그것을 담아내는 틀의 유동성을 강조하며, 분명한 범주화를 규정할 수 없음을 가시화한다. 마치 21세기의 정체성 그것처럼 유기적이다.

기표에 담겨있는 역사적 층위들을 복원시키고 가능한 의미로의 연결들을 개방함으로써 기호는 다시 조심스럽게 차이를 발생하다. 이것은 호미 바바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주창하는 ‘부분적 차이’를 통한 주체의 상정과 다르다. 후기구조주의 이론이 강조한 차이와 해체도 궁극적으로 경계와 범주에 대한 강조에서 출발한다. 라캉, 데리다, 바바의 이론도 서구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미학적, 미술사적 평가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한 헤겔의 분류체계의 계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계보는 이성 중심과 이상적 가치관, 절대 진리와 원형을 상정하는 서구 철학의 전체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

한국 작가들은 서구 인식론의 체계와 다른 경험을 통해서, 분류,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들 제작했고, 이것에 대한 평가는 비서구적 비평과 글쓰기를 통해 전달돼야 한다. 남성보다는 차이를 섬세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한국의 2세대 여성 작가들은 차이 속에 내재했던 정체성의 탈-경계적 속성을 가시화함으로써, 새로운 미술과 역사의 관계를 검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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