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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고유의 정치성 해석이 시원하지 않다
작품 고유의 정치성 해석이 시원하지 않다
  • 김정화 문학평론가
  • 승인 2011.10.2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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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노벨문학상 수상작 경향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가 선정되자, 노벨문학상에 대란 논란이 또다시 불거졌다. 스웨덴 검찰이 선정 사실에 대한 사전 유출 여부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힌 게 도화선이 됐겠지만, 논란의 중심은 해마다 되풀이 되는 노벨문학상의 고질적인 문제들에 있다.

노벨문학상은‘이상적인 방향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선정기준 덕분에 다분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명이 무색할 정도로 이 상은 꾸준히 비판받았다. 그렇다면 노벨문학상은 왜 여전히 문제적인가.

임레 케르테스는 헝가리 출신으로『운명없는 인간들』(1975)을 통해 강제수용소 경험들을 절절한 언어로 생생하게 담아낸 것을 인정받아 2002년 수상자로 선정됐다. 2003년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존 맥스웰 쿠체가『야만인을 기다리며』(1980),『 마이클K의 삶과 세월』(1983) 등의 작품을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잔인한 인종주의, 서구문명의 위선을 비판해 수상자 대열에 발탁됐다.

2004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인 엘프리데 엘리네크가 사회의 진부한 사상과 행동, 그것에 복종하는 권력의 불합리성을 보여준『피아노 치는 여자』(1983)로 노벨상 수상자로 호명될 수 있었다. 2005년에는 영국의 해럴드 핀터가 극작가로서 현대 연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웨덴 한림원의 영예의 대상자가 됐다.

2006년에는 터키의 오르한 파묵이『내 이름은 빨강』(1998)으로 터키 역사를 중심소재로 삼아 동·서양 문명 간의 갈등을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해서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영국 출신인 도리스 레싱은 2007년에 페미니즘 소설의 고전인『황금노트북』(1962)으로, 2008년에는 프랑스 작가인 르 클레지오가 주류 문명을 넘어 인간성 탐구에 몰두했다는 공로로, 2009년엔 독일의 헤르타 뮐러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저지대』(1982)로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010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저항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권력 구조 지도와 개인의 저항, 반란, 패배에 대한 그의 강력한 이미지들을 선보인『도시와 개들』(1963),『 녹색의 집』(1966)으로, 그리고 올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가 현실에 대한 신선한 접근을 제시한 문학적 탐색을 인정받아 15년 만에 詩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탈식민주의 계열 작가에 수상 이어지는 이유

최근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범박한 의미의 정치성이다. 수상자들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행된 현실, 그로 인해 억압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작가들이 주를 이룬다. 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있어 정치적 의미가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방증하는데, 새로운 시대에 맞는 문학적 경향과 정신을 수용하고자 하는 노벨위원회와 스웨덴 한림원의 의지로 볼 수 있다. 즉 문학적 제국주의와 정신적 식민지 상황에 놓여있는 문제를 탐구하는 탈식민주의계열 작가들에게 노벨문학상 수상이 이뤄졌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성이 작품 속에 내재된 고유한 특징, 훨씬 더 복합적인 중층적 의미의 정치성으로 깊어지는 게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영향력의 문제로 협애화 된다는 점일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경우 파급될 영향력을 고려해 선정한다는 얇은 의미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헤르타 뮐러의 경우, 일부에서는 그녀가 상을 받는 것이‘공산주의 붕괴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뮐러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가능하게 한 건 그녀의 문학성 이면에 루마니아계 출신으로 정치적 박해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맥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저항 작가로 손꼽히는 페루출신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수상과도 연관이 있다. 문학적 성과 이면에 군사정권에 대항한 페루 시민들의 영웅이라는 후광효과가 작용했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맥스웰 쿠체의 경우에는 그가 이미 영국문단에 인정받고, 어느 정도의 입지를 갖고 있는 작가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쿠체의 수상은 남아프리카문학의 문제적 수준을 복기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영국문단에 수용된 남아프리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을 각인하는 데 멈췄다. 이들의 수상이 생색내기용에 지나지 않다는 시각이 가능한 이유다.

2011년 노벨문학상, 15년 만에 시인에게로

노벨문학상의 정치적 성향은 수상작의 선정기준이 변화되면서 나타난 최근 현상이다.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새로움으로 대변하기에 이 상은 여전히 고질적인 문제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국경을 초월해 범세계적인 문학 작품을 선정하겠다는 의지가 무색할 정도로 현재도 특정 언어권, 특히 유럽 작가들에게 노벨상이 치중돼 있다. 지난 10년 간 수상자 가운데 유럽계 작가가 7명인 것에 비해, 비유럽계 작가는 3명 뿐이다. 게다가 비유럽계 작가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치적 파급력에 의해 선정되거나, 영국 문단에 인정받은 작가들로 한정된다. 물론 영어권 문학이 다른 언어권 문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시장을 갖고 있어서겠지만, 수상자가 지나치게 유럽 작가들에게 치중돼 있다는 비판을 그만두기에는 노벨문학상이 더욱 교묘하게 특정 언어권 중심의 문학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

장르적 측면에서도 노벨문학상은 순수 문학, 특히 소설에 치우쳐 있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에 이르면서 더욱 가중됐는데, 최근 10년간의 수상작들 중 소설가가 8명인데 반해, 극작가가 1명, 그리고 올해 15년 만에 시인 1명이 선정됐을 뿐이다. 초기에 역사가나 철학자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전례를 본다면 오히려 순수 문학에만 집착하는 현재의 노벨문학상 선정 경향은 스스로의 권위를 위축시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란 비난을 피해가기 어렵다.

노벨문학상을 둘러싼 잡음은 계속되고 있다. 수상작 선정과정의 공정성이 의심받고 있으며, 남성 중심적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유럽 문단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지대해 보인다. 노벨문학상은 하나의 역설이기도 하다. 유럽이 만든 하나의 꿈에서‘제대로’탈피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난히도 노벨문학상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국가에 노벨문학상이 돌아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만으로 특정 문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문학의 진정한 영광은 노벨문학상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참된 가치들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자주 노벨상 후보로 오르내리는 시인 고은에게 이‘위대한 상’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단지 아시아의 한국작가이기 때문이라고 문학 종사자들과 그 저변에서 생각하고 있다면 이건 곤란하다.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 일본 문학의 저변과 비교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우리가 겪어온 특수한 중층적 근대의 경험, 유교적 전통, 식민지, 이데올로기 전쟁, 분단, 그리고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장대한 스펙터클의 서사를 인류 보편의 언어로 정교화하는 작업의 의미를 대범하게 사유하는 것이 노벨문학상 수상의 일희일비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본다. 이제는 특정 문인의 이름에 매달리기보다 한국문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심화를‘인류’라는 이름으로 따져볼 때다.

김정화 문학평론가
필자는 선문대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국 현대소설에 나타난 근대의 중층성을 탐구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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