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8:40 (수)
동식물의 변장술에 작동하는 미메시즘의 수사학 조명
동식물의 변장술에 작동하는 미메시즘의 수사학 조명
  • 김성도 고려대·언어학과
  • 승인 2011.10.11 11: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술대회 참관기_ 2011년 유럽 시각기호학 국제학술대회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포르투갈의 리스본 대학에서 세계 시각기호학회와 공간기호학회가 공동 주최한 유럽 시각기호학 국제 학술대회 (European Regional Congress 2011)가 개최됐다. 전체 주제를 ‘공간의 기호학과 기호학의 공간들’로 설정한 이번 학술대회에서 유럽의 전통적인 기호학 강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학자들을 비롯해 30여 개 나라에서 약 300명이 참석했다. 160여 편에 이르는 다양한 시각들의 논문들이 발표됐다.

건축기호학의 대가인 스위스의 펠레그리노 교수, 움베르토 에코의 후계자로 이탈리아 기호학을 이끌고 있는 파브리 교수, 그레마스의 수제자이자 프랑스 기호학계를 대표하는 퐁타니 교수(리모쥐 대학 총장) 등의 기조 발제에 이어 ‘경험의 공간’, ‘기호학과 사이버스페이스’ 등 10 여개의 하위 주제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분과들에서 흥미로운 논문들이 발표됐다.  

이번 2011년 유럽 시각기호학 국제학술대회의 백미는 파브리 교수의 기조발표였다. 곤충과 어류의 은폐기술을 기호학적 전략으로 이해했다.

1970년대부터 건축 기호학의 이론적 정초를 다진 후 도시 기호학으로까지 연구 진영을 확대시킨 펠레그리노 교수의 논의가 눈길을 끌었다. 펠레그리노 교수는 자신의 직계 스승 프리에토와 옐름슬레우의 언어 이론을 공간 해석에 활용해 건축 기호학의 이론적 토대를 정립한 자신의 지적 과정을 기술하면서 "기호학은 탁월한 ‘공간의 비교 인식론’으로 활용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논의는 공간 기호학과 시간 기호학을 더 이상 분리된 분과 학문으로 다루지 말고, 공간-시간 기호학의 종합적 이해를 시도할 인식론적 필요성을 역설한 데 의미가 있다. 그는 공간과 시간의 기호학 사상을 고대 그리스의 공간 사상과 접맥시키면서 공간 기호학의 개념적 계보를 수립한 후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언어에서 구별한 ‘코로스’, ‘카오스’, ‘크로노스’등의 다양한 시간 개념과, ‘토포스’, ‘폴리스’ 등의 다양한 도시 공간 개념들을 도시 공간 기호학으로 재해석하는 작업), 현존과 부재의 변증법이 공간의 ‘세미오시스’를 창조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주목한 공간은 다름 아닌 사이버 공간이었지만, 우려가 앞섰다. 자신의 늦둥이 아들이 게임에 몰입하는 것을 사례로 들면서, 사이버 공간에서의 주체성에 대한 회의를 피력한 그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기존의 물리적 공간과는 전혀 다른 속도감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소멸을 거치면서, 결국 주체의 ‘몸’이 가상 세계로 흡수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신체적 경험의 실종에 경종을 울렸다. 

기존의 시각기호학 연구가 소홀했던 것

이어서 독일의 인지 언어학자이며 동시에 복잡계 이론과 구조 기호학을 접목시켜 도시 형태 발생론을 연구해온 브레멘 대학의 빌트겐 교수의 발표가 이어졌다. 그는 선사 시대 최초의 인간 정착지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구체적 비교 사례로 예시한 리스본, 파리 등 4개 도시의 공간 발생과 팽창에서 발현하는 형상들에 대해서 형태 동학 이론(morphodynamics)을 적용, 도시 공간 형태의 보편적 문법을 판독해내고자 했다.

둘째 날 계속된 기조발제에서 퐁타니 교수는 기존의 시각 기호학을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기존 시각 기호학 연구는 주로 시각적 발화체, 즉 가시적인 최종 작업에 초점을 두면서 재현적 차원에 머무른 나머지, 표면적인 시각 이미지 현상의 생산 과정과 시각 언어의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인식에 초점을 두는 '시각 언어의 발화 작용'에 대한 연구가 소홀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그는 이런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시각적 생산과 해석은 사회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시각 작업의 행동과정(modus operandi)에 새로운 초점을 둘 필요성을 역설했다. 모든 시각 현상에는 반드시 보여줄 수 없거나,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시각적 부재가 공존한다는 퐁타니의 주장은 이어 발표된 파브리 교수의 논문과 접맥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가장 큰 반향과 관심을 불러일으킨 파브리 교수의 논문은「보이는 것의 전략: 세포에서 인간까지 미메시즘의 현상」으로서, 이론적 단초는 에코의 기발한 기호학 정의에서 출발한다. 에코에 따르면 기호학의 연구 목적 가운데 하나는 "거짓을 말하는 데 사용되는 기호들을 연구하는 데 있다." 파브리 교수는 모든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서 행하는 변장술과 은폐 현상을 앞으로의 기호학이 연구할 호제임을 천명했다.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생명기호학(biosemiotics)으로 정의한 파브리는 "기호학은 참된 진리의 현상 연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모방’, ‘가짜’, ‘시뮬라크룸’, ‘변장’, ‘갈등’ 등 의도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생명계에서 목격되는 무궁무진한 기호학적 현상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을 던질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파브리 교수의 논의가 청중을 사로잡은 데는 독특한 그의 접근 방식이 주효했다. 그는 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서 추출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기호학의 연구가 논리학과 철학처럼 진리 체제에 한정되지 않고,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개체들이 행하는 효율성의 체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를테면 세포 단위에서 악성 바이러스가 정상 세포를 파괴하기 위해서 실행하는 변장술에서 시작해, 포식자를 속이기 위해서 곤충과 어류에서 나타나는 놀라운 은폐 기술(예컨대 일부 종은 자신의 포식자의 매서운 눈을 흉내 낸다) 등은 모두 자신의 정체를 보이지 않게 만들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타자로 생성되는 고도의 기호학적 전략임과 동시에 타자의 인식을 효과적으로 교란시키는 조종의 기호학으로 볼 수 있다는 논지였다.

파프리 교수의 기호학적 상상력의 백미는 이 같은 효율성의 지평에서, 기존의 은유와 환유 등의 수사학적 전략을 앞서 언급한 변장술의 기호학적 전략으로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동식물의 변장술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의 비유법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미메시즘’의 수사학적 구조가 작동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 탁월한 기조 발제였다.

기호학 학술대회에 참석한 건축학자들

이 밖에도 로마대학의 페자니 교수가 로마 교외의 도시 갱생 재개발에서 성취한 아름다운 경관 창조에 대한 기호학 모델의 성공적 활용 사례를 소개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신예 연구자들이 선보인 바르셀로나, 상파울로 등의 도시 브랜딩의 분석 등, 공간 기호학과 시각 기호학의 실제 적용 사례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번 학회에는 유럽지역에서 다수의 건축학자들이 참석했는데, 기호학을 비롯해 정신 분석학, 사회학 이론 등 다양한 인문학 모델을 수용함으로써 새롭게 건축이론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예컨대 스페인의 대표적인 건축학자인 문타놀라 교수는 바흐찐의 대화 이론, 특히 ‘창조적인 시적 시간’ 개념에 착안해 건축된 초등학교 건물을 일반 학교 건축물(독백적 건축물)과 대비해, 초등학생들의 보다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이뤄낸 것을 구체적 수치를 들어가면서, 성공 사례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컴퓨터가 건축가의 모든 작업을 대신하게 됐으나 ‘마지막 휴먼 터치’인 시적 상상력은 건축과 사람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최종 요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건축 기호학의 중견 학자인 레비 교수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시 담론을, 경제적 전략 담론, 디지털 담론, 지속 가능성 담론의 유형론으로 파악한 후, 각 담론에서 노출되는 이데올로기적 서사적 차원을 부각시키면서, 대서사의 역설적 귀환을 진단했다.  

필자는 최근 모바일 미디어에서 부상하는 증강 도시 현상을 주제로 설정하고, 특히 가상적 글쓰기 문제에 천착, 도시 공간과 언어 매체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매체성의 문제를 비교 매체 문화사의 관점에서 연구할 것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해 호응을 얻었다.

김성도 고려대·언어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