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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대덕, 이대로는 안된다
[특집]대덕, 이대로는 안된다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0.1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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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꺼진 연구소, 떠나는 연구원…지원늘리고 독립운영 보장돼야
“과학입국? 허울좋은 말 일 뿐입니다. 김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죠. 법관이나 의사, 재벌 회장을 아버지로 둔 이들보다 과학자를 아버지를 둔 이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지금 대덕연구단지의 불은 꺼져가고 있고, 연구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정부 출연연구소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 아무개 씨가 털어놓는 ‘대덕’의 형편은 언론을 통해 접하고 있는 사정과는 사뭇 달랐다. 일개 연구책임자의 푸념으로 넘겨버리기엔 다음 말이 심상치 않다.

“IMF이후 연구원들의 이직이 급증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구소만 해도 지난해 2백명, 올해 2백90명 등 최근 3년간 1천5백명의 연구원 중 1/3이 떠나갔습니다. 주로 벤처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자리만 있다면 언제든 옮기겠다는 연구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원자력연구소에 근무중인 이 아무개 박사가 전하는 연구소의 형편은 더욱 심각하다. “개별 연구소의 경영난이 심각합니다. 우리 연구소만 해도 올해 급여를 10개월분 밖에 받지 못해, 11월 급여를 퇴직충당금을 전용해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경영난·인력난·낙하산 인사 삼중고

과학연구의 메카, ‘대덕’이 흔들리고 있다. 정부의 지원과 연구과제의 수주가 뚝 끊겨 심각한 경영난으로 연구원들 급여조차 제때 주지 못하는 곳이 생기는가 하면, 연구인력의 대대적인 이직바람으로 연구과제 수행에 차질을 빚는 곳도 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각종 연구소의 사정은 최악을 맞고 있다는 것이 연구원들의 전언이다. 대덕연구단지는 현재 정부출연연구기관 20곳, 정부투자연구기관 10곳, 기업부설연구기관 25곳 등 총 70개의 연구기관에 1만4천여명의 연구인력이 근무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과학연구 중심지이다.

‘대덕’이 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일까. 현장 연구원들이 말하는 주된 요인은 다음 몇 가지이다. 연구소들의 경영난은 ‘연구과제 중심운영제’(PBS)와 구조조정을 이유로 한 정부의 예산삭감때문이라는 것이 설명이다. PBS제도란 수주한 프로젝트의 연구용역비로 연구비와 인건비를 충당하는 제도. 정부는 재정부담을 줄이면서 운영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지난 95년부터 이를 모든 연구소에 적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연구소의 살림은 과제를 수주해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이하 과기노조) 이광오씨는 “95년 이전까지 연구소의 인건비는 별도항목으로 지원됐다. 하지만 PBS제도가 도입된 후 관리운영비를 제외한 인건비와 연구비 등을 모두 수탁과제 연구용역비로 충당하게 됐다. 때문에 수행과제가 적은 연구소는 자연히 경영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원자력연구소의 김영균 박사는 “PBS제도가 시행되면서 연구책임자들의 본업이 연구에서 수탁 과제를 따오는 것이 돼 버렸다”며 “큰 프로젝트가 발주될때면 심사위원들을 찾아 로비를 펼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밝혔다. 연구과제를 구걸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98년 구조조정이후 출연연구소들은 연합이사회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가 적지 않다. 운영은 연합이사회에서 맡지만 주된 업무는 관계부처가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연구소의 이 아무개 박사는 “연합이사회는 연구소 운영의 ‘옥상 옥’ 구실밖에 못하고 있다. 여전히 관계부처의 입김은 그대로 작용하고 있고 임금협상 등 노사문제가 발생할 때만 연합이사회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운영구조내에서 관계부처의 낙하산 인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과기노조의 이광오씨는 “과거엔 소장, 원장 등 고위급들의 낙하산이 많았지만 최근엔 구조조정으로 공백이 생긴 현장연구원들 자리가 관계부처 행정직·전문직으로 채워지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원자력안전기술원은 과학기술부로부터 3명의 행정직의 받아들여주지 않을 경우 30명의 신입연구원 충원을 허용할 수 없다는 방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낙하산 인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형편이 이쯤되면 현장 연구원들의 이직현상과 사기추락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표준과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기회만 닿는다면 언제든 떠나고 싶다. 대덕에서 일한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낀 때도 있었지만 이젠 미련마저 떨쳐버렸다”고 털어놓았다. 원자력 연구소의 김영균씨도 “벤처가 활성화돼 있는 연구소의 일부 연구원들은 낮에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벤처를 창립하기 위해 자기만의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부문별 연구소간 역할분담 필요

하지만 정부도 나름대로 불만은 있다. 연구소의 연구 중 상업화되는 비율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PBS제도란 극약처방을 내린 것도 자구노력을 강구하고, 생산적인 연구를 촉진하기 위함이라는 것. 하지만 연구소측의 항변도 만만치 않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의 김 아무개 연구원은 “문제는 정부가 돈이 되는 연구만을 강요하고, 연구의 각 부문간 역할분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데 있다. 대학은 기초연구, 출연연구소는 응용연구, 기업은 실용연구로 역할분담이 이뤄지면 연구의 효율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수탁과제를 놓고 대학과 기업, 출연연구소가 피터지게 싸우고 있다.”위기를 극복하는 단초로 현장 연구원들이 바라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달라는 것. 이를 위해선 정부의 지원이 확대되고, PBS제도를 고쳐 각 부문간 연구영역을 특화하는 한편, 관리체제를 일원화하는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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