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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지평’에서 영원의 규칙성을 읽어내다
빈센트 반 고흐, ‘지평’에서 영원의 규칙성을 읽어내다
  •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
  • 승인 2011.10.04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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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③ / 빈센트와 ‘평탄하고 끝없는 대지’

人平不語, 水平不流. ‘사람 마음이 화평하면 말이 없는 법. 물이 평평하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宋의 禪書『五燈會元』권18에 나오는 말. 서울의 모 사찰 문에서 이 글귀를 본 적이 있는데, 문득 여기서 이게 떠올랐다. 네덜란드인들의 평등 의식, 평지에 정지한 운하를 집약한 말 같다. 지평ㆍ수평ㆍ평지. 이런 기하학적 인식이 네덜란드인들의 평등의식을 지탱하는 게 아닐까.  

빈센트의 자화상을 보고 그린 쓸쓸한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그림=최재목
창문 틈으로 쌀쌀한 바람이 스며들어 잠들지 못하던 여름 밤.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엮고 옮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북스, 2010)를 읽었다. 빈센트 반 고흐(이하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詩 같은 편지들. 나는 거기서도 무의식중에 지평ㆍ수평의 기하학적 사고를 응시하고 있었다. 곡선에 익숙한 나에게 그건 낯설고 신선한 숨은그림찾기다.

나는 생각했다. 빈센트의 글과 그림에도 네덜란드 지형에서 습득한 기하학적 사고가 암묵리에 표출되어 있을 거라고. 나아가서 그런 사고는 거슬러 오르면 스피노자로, 더 나아가서 네덜란드에 오래 은둔하였던 데카르트에게로 링크되어 있을 거라고. 나의 가설적 상상력 속에 체크 되던 이 ‘직선’ 하나. 네덜란드 거주시기에 쓰고 그린 빈센트의 편지와 그림에서는 어땠을까.   

헤이그에 살던 시기 빈센트는, 네덜란드의 북동부 즈베일로(Zweeloo)로 가서, 그곳의 평탄한 대지에서 받은 깊은 감동을 동생 테오에게 편지(1883년 11월 1일경)로 썼다.

“평탄하고 끝이 없는 검은 대지, 라일락 색과 흰색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룬 맑은 하늘. 그 대지는 마치 그 속에 곰팡이를 키우듯 어린 밀을 싹틔우지. 그것이 드렌테의 비옥한 토지가 하는 일이야. (중략) 이 지방을 몇 시간 걸어보면 밀의 곰팡이나 히스를 키워내는 끝없는 대지, 하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을 받게 돼. 말과 사람들은 마치 벼룩처럼 작게 보여. 설령 인간이 자연 속에서 아무리 크다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라곤 거기에 대지와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뿐이야. (중략) 오른쪽은 끝없이 이어지는 히스의 황야. 왼쪽도 끝없이 이어지는 히스의 황야.”(283~285쪽)

빈센트가 본 것은 ‘평탄하고 끝없는 대지’- ‘대지와 하늘이 명확한 대비로 존재하는 모습’- ‘좌우로 펼쳐지는 끝없는 황야’였다. 천지자연의 영원함, 살아 꿈틀대는 생명체들의 왜소함을, 빈센트는 깊은 눈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닿아 있고, 열심히 일하는 농민들이 보인다. 빈센트, <스헤베닝겐의 바다풍경>(1882),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소장

그 뒤, 그는 헤이그를 떠나 네덜란드 남부 지역 누에넨(Nuenen)에 살았다. 거기서 받은 느낌을 또 테오에게 편지(1885년 6월초)로 써서 보낸다. 역시 빠짐이 없다. ‘대지-들판’에 대한 관찰력은. 

“오늘, 그 작은 상자를 보냈어. 그 속에는 전에 말한 것 외에「농민들의 묘지」라는 유화를 넣었어. 세부는 상당히 생략했어.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그 폐허가, 수백 년간 농민들이 파고 또 팠던 그 들판 자체에 매장되는 것을 얼마나 여실히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었어. (중략) 그 주위의 들판은 교회 묘지의 풀밭이 끝나는 곳에서 작은 울타리 너머 지평선 - 바다의 수평선 같은 - 과 접하여 최후의 선을 이루고 있어. 지금 이 폐허가 나에게 말하는 것은, 아무리 견고한 기초를 다진 신앙이나 종교도 결국은 썩어버리고 말지만, 농민들의 삶과 죽음은 언제나 똑 같이 이어진다는 거야. 즉 그 교회 묘지의 지면에 자라고 있는 풀이나 작은 꽃처럼 규칙적으로 태어나고 죽어간다는 얘기지.”(338~339쪽)

농민들의 묘지. 수백 년간 그들 스스로가 파고 또 팠던 그 들판 자체에 그들이 다시 매장되어 가는 곳. 지평의 線에서 노동을 하다, 그 선에 스스로가 묻혀가는 것. 빈센트는 폐허가 된 교회 묘지를 통해서 자신의 사색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 ‘아무리 견고한 기초를 다진 신앙이나 종교도 결국은 썩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교회 묘지의 지면에 자라는 풀, 작은 꽃처럼, ‘농민들의 삶과 죽음은 언제나 똑 같이 이어진다’. 그는 지평의 ‘線’에서 모든 생명체가 갖는, 영원히 이어지는 생멸의 규칙성을 초연히 정리해낸다. 마치 스피노자가 그의『에티카』제5부ㆍ정리6에서 “모든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그 사물의 영향력을 초월한 더 큰 힘을 가졌거나 그 영향력으로부터 덜 괴로움을 당한다”라고 한 말처럼. 빈센트의 머릿속엔 이런 기하학적 사고가 자리했고, 그것을 통해 ‘영원’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직조공의 왼쪽에 액자 같은 창문 너머로 낡은 교회, 그리고 밭일을 하는 농부가 보인다. 빈센트, <열린 창문 가까이의 직조공>(1884),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빈센트가 누에넨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열린 창문 가까이의 직조공>(1884년)(바로 위 그림)에는 조그만 창문으로 넓은 들판과 밭일을 하는 농부, 그 뒤로 무너져 내릴 듯한 황폐한 교회가 보인다. 이것을 확대한 것이 <낡은 교회 탑과 농부>(1884년)(아래 그림)이다. 부조리한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고 침묵하던 무기력한 종교와 교회를 상징한다. 종교도 교회도 망하고 남는 것은 지평의 선. 거기서 영원히 지속되는 생멸의 기하학적 흐름. 그 사실 뿐. 빈센트는 그것을 초연히 그려내고 있었다.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아래,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대지 위 밭일을 하는 농부들과 교회 옆(그림 왼쪽)의 묘지가 보인다. 빈센트, <낡은 교회 탑과 농부>(1884),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국립미술관 소장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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