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9:15 (금)
비물질노동자의 잠재력을 특권화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비물질노동자의 잠재력을 특권화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
  • 곽노완 서울시립대·경제철학
  • 승인 2011.09.26 1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평_『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4)

 

1980년대부터 변혁적인 지식인의 길을 걸어 왔던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갈무리, 2011)가 올해 4월에 출간됐다. 57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은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뿐만 아니라 68혁명 이후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로 정의하면서 새로운 변혁주체로서 다중을 재구성하는 야심작이다. 다루는 주제들은 인지의 개념, 인지자본주의에서의 가치법칙, 공간 및 시간·계급·정치·지성의 재구성, 21세기 혁명과 인지적인 것 등이다. 그리고 정치철학과 정치경제학비판 그리고 도시학 및 1990년대 이후의 지구적인 변혁운동을 가로지르는 학제적인 연구성과다. 이처럼 방대한 지식분야를 넘나들면서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경탄스럽다.

그에 따르면, 인지란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의지하는 등의 활동에 포함되는 정신적 과정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인지는 주류철학에서 특권화됐던 인식(knowledge)을 대체하고 전복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활동이, 인식만이 아니라 정동적인 정신작용과도 연계됐음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전복적인 인지 개념은, 포드주의 이후 현대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인지작용과 연계된 비물질노동 내지 삶활동을 통해 ‘공통적인 것(the common)’ 또는 ‘공유지(the commons)’의 생산이 주축을 이룬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의 인지 개념은, 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정치·공간·시간·계급이 어떻게 이전과 달리 재생산되며 재구성되는가를 포착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자본을 보는 서로 다른 시선

저자에 따르면,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자본은, “고용된 노동의 발명력은 물론이고 고용되지 않은 노동들의 발명력도 착취한다.” 특히 인지자본주의적인 금융자본은 다중의 삶활동을 통해 생산된 ‘공통적인 것’을 독점적으로 전유한다.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금융자본은, 부채로 축적된 자본으로 노동자와 빈민에게도 대출해 이자를 얻으며 나아가 다양한 금융파생상품 등을 창출하고 이에 투기함으로써 미래의 잉여가치를 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금융자본이 파산위험에 처할 경우 국가는 국채를 통해 금융자본가를 구제하면서 국민들과 다중에게 상환의 부담을 전가하는데, 이는 현대의 금융자본이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체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금융자본의 실체가 전 지구적 다중의 공통노동이라는 주장은 맞지만, 금융자본의 원천이 인지적인 비물질노동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금융자본과 인지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절합 논거는 더 세밀하게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고용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여 다중의 인지활동 결과가 자본에 의해 독점적으로 전유된다는 지적은 현대자본주의에서 착취와 수탈의 변환을 부분적으로 적실하게 드러내 준다.

이는 비물질노동 개념과도 연계돼 있다. 저자는, 현대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이 인지적으로 재구성됐다고 본다. 그리고 이처럼 인지적으로 재구성된 노동을 비물질노동 내지 삶정치적 노동이라고 부른다. 이 때, 비물질노동은 “노동과정에서 독립된 물질적 생산물이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 개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술노동, 감정노동, 지식노동, 정보노동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비물질노동이 자본으로부터 보상받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자본이 이를 독점적으로 전유한다고 할지라도, 자본에 고용돼 있는가 여부에 따라 비물질노동자들도 이원화되지 않을까. 그는 산업노동의 비중이 축소되고 있으며 고용된 산업노동자들은 혁명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용된 비물질노동자의 경우도 혁명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그의 답변은, 비물질고용노동의 경우 원거리노동이 가능해 불안정노동이 많고 따라서 비물질노동자들이 산업노동자보다 혁명적 잠재력이 높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체로 비물질노동·인지노동·비정규직의 외연이 수렴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노동·육체노동·정규직의 외연이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두 범주틀을 대비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의에 따를 때 배달노동·택배노동·청소노동은 물질적인 생산물을 낳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물질노동이지만, 육체노동임이 분명한 점에서 비물질노동이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산업노동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 정규직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비물질노동≒비정규직, 물질노동·육체노동≒정규직이라는 정식 그리고 비물질노동은 대체로 불안정노동이기 때문에 물질노동에 비해 더 많은 혁명적 잠재력을 갖는다는 도식은 더 세밀하게 논증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비물질노동 대 물질노동’이라는 자율주의의 개념틀보다, ‘정규직 대 비정규직(내지 불완전노동) 대 무임노동’이라는 개념틀이 현대자본주의의 노동상황을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이와 더불어 저자는 안토니오 네그리에 따라 메트로폴리스를 삶정치와 공통적인 것의 공간으로 정식화한다. 조정환에 따르면, 메트로폴리스의 마천루와 주식시장은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면서 이를 숨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 반대하는 운동을 야기하면서 ‘공통적인 것’의 진정한 생산자 곧 비물질노동자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인지적인 공통공간으로서 메트로폴리스는, 다중 각자가 스스로 지도자가 될 잠재력을 드러내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2008년 한국의 촛불봉기와 2010~11년의 아프리카 및 아랍의 혁명과정을 들고 있다. 인터넷과 통신 혁명이 통치권력에 저항하는 힘을 메트로폴리스에서 집약적으로 연결시키고 지구적인 연대를 가능케 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인터넷과 통신 혁명이 다양한 사회성원들을 ‘공통되기’를 통해 연합하도록 촉진해 누구나가 지도자가 되는 경향을 낳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통신활동을 노동의 일부인 비물질‘노동’으로 환원하지 않고는 그러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검찰, 국회의원, 경찰, 기자, 방송국고위직은 비물질노동자가 맞지 않은가. 그렇다면 비물질노동자의 혁명적 잠재력을 특권화시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등등의 의문에 대한 답변이 궁금하다. 

깨우침과 배움, 그리고 시사점

또 마르크스와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문제의식이 정당하다면, 네그리나 하트 등의 자율주의와 비판적으로 대결하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아닐까. 이 책에서는 자율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대결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금융자본 문제와 국가 문제에 대해서는 네그리와 하트의 입장이 최근 들어 수정됐는데, 저자인 조정환의 입장도 그들의 입장변화에 따라 종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수백 명의 논자들을 소개하면서 현대자본주의의 변환을 재구성하고, 프레카리아트· 프리터·프리커·사이버타리아트·코그니타리아트·다중 등 새로운 주체의 지평을 폭넓게 검토하고 재구성한 점은 돋보이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깨우침을 준다. 그 외에도,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사적인 것으로 환원되거나 사적인 것을 후원한다는 점에서, 모두의 것인 ‘공통적인 것’ 내지 ‘공유지’와 다르다는 성찰 등은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운 부분이다. 그 외 저자가 제기한 수많은 논점들은, ‘공통적인 것’이 돼 현대자본주의와 우리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사점을 줄 것이다.  

 

곽노완 서울시립대·경제철학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경제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논문으로는 「21세기 대안사회의 경제철학」등이 있으며, 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로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