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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교수 눈으로 본 ‘한국지성사회’
외국인 교수 눈으로 본 ‘한국지성사회’
  • 마이클 필립
  • 승인 2002.06.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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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지성인’이라는 이름
마이클 필립 / 대구가톨릭대 객원교수

나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지성인’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이라는 말이 사실상 ‘배우고, 사고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지성인’이라는 단어는 ‘월등히 높은 지성을 가진 사람’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지성인’만을 초대하는 특별한 파티를 연다고 가정해 보자. 위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성인’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나는 ‘한국 전체’를 ‘지성사회’로 보려고 하며, 특히 세 그룹의 ‘지성인’, 즉 ‘학생’, ‘농부’, ‘교수’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6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나는 5천명 이상의 학생들을 만나왔다. 한국학생들의 삶은 북미학생들의 삶과 놀랄 만큼 다르다. 한국의 중학생들은 대체로 하루 10시간 정도를 공부에 투자하지만, 북미의 경우 약 6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학생들은 ‘지성인’으로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북미에서는 많은 선생들이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한다.
다음으로, 한국을 ‘살아있도록’ 만드는 지성인, 즉 ‘농부’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한번은 농부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일상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의 직업은 ‘단순해’ 보였는데, 그때의 경험은 ‘나의 오판’을 바로잡아 주었다. 1996년, 나와 가장 친한 한국인 친구가 함께 삼촌네 밭에 가서 추수를 돕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려워 봤자지. 고작 딸기를 따는 일인데’. 그러나 일을 하고 난 후, 비로소 나는 밭일이 얼마나 많은 기술을 요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 ‘지성인’들은 비록 교육을 ‘덜’ 받았을지라도 나라에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대학교수들을 만나 왔다. 놀랍게도 많은 한국인 교수들이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는데, 이것은 북미 대학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우리, 즉 ‘외국인 교수’들을 모임에 초대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한국 교수들은 우리를 ‘진짜 교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교수들은 매우 지적이며, 지식이 풍부하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영어 과목을 담당하는 한국인 교수들을 발견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지성인으로서의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언어를 효과적으로 교수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에 충분히 젖어들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몇몇 교수들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언젠가 한 영어과 교수의 영어 논문을 읽다, 어떻게 영어 교수가 그토록 많은 문법적 실수를 할 수 있는지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지성사회’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난감했다. 나는 한번도 ‘지성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지성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지성인’들로 채우기 위해, ‘모든 지성인’들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 할 것이라 생각한다.

번역/정리 박나영 기자 imna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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