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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세계제작자 '데미우르고스' 그 비밀을 벗기다
플라톤의 세계제작자 '데미우르고스' 그 비밀을 벗기다
  • 송유레 서울대 HK교수
  • 승인 2011.09.1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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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강평기_서울대 인문한국 문명사업단ㆍ철학사상연구소 '국제문명연구 심포지엄'

플라톤의 세계제작자를 조명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1509~1510)의 부분 확대 모습. 왼쪽이 플라톤이다
‘데미우르고스: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바라본 세계제작자’라는 주제로 지난 9월 8일(목)부터 9일(금)까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인문한국(HK)문명사업단과 철학사상연구소가 문명연구 국제 심포지엄을 공동으로 개최했다.

‘神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을 접하고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따져보기도 전에, 그 말이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재보지도 않은 채 정신적 충격을 받은 자신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다는 한 철학 교수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의 ‘서양’ 인문학 수용사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서양에서 ‘수입한’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자칫 자신이 연구하는 ‘낯선’ 세계에 함몰돼, 그 세계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반성적 거리를 잃기 쉽다. 그리하여 ‘낯선’ 세계에서 온 많은 말들이 비판적 숙고를 거치지 않은 채 한국 인문학의 일상 속에 편입될 위험이 있다. 나아가 견실한 학문적 기반이 없는 인문학의 유행은 현혹적인 修辭로 치장된 ‘아전인수격’ 이론을 양산할 수 있다. 낯선 것을 ‘사대’하거나 ‘배타’하는 대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연구하는 사람들과의 지속적 소통이 유익할 것이다.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개념들은 종종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개념들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문제의식과 통찰, 그리고 염원을 펼쳐 보여주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대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준다. 그러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신’이다.

  이번 심포지엄은 이른바 ‘서양’과 근동의 여러 문명권을 가로질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신적인 세계제작자’ 내지 ‘조물주’ 개념에 주목해, 주요 철학사조와 종교에 몸담은 사상가들의 다양한 시각과 해석을 살펴보기를 도모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편에서 세계를 제작하는 신적인 匠人 ‘데미우르고스’를 도입한다. 플라톤의 세계제작자는 플라톤주의 철학에서 우주의 형이상학적 원리 내지 만물의 원인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영지주의의 악하고 어리석은 조물주로 왜곡되기도 하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창조주로 변모하기도 한다. 

심포지엄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해, 중기 및 신플라톤주의가 어떻게 세계제작신화를 탈신화적으로 읽었는지를 논했고, 이어서 일신교 전통의 신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플라톤의 세계제작신화를 창세기 해석과 접목시켰는지를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에리우게나, 샤르트르의 티에리, 그리고 이슬람 시아파 신학자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나아가 기독교와 플라톤철학의 통합을 시도한 르네상스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창조론과 만물의 ‘원인’인 신과 인간의 인과성을 고찰한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살폈다.

  특히,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누구인가 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주요 쟁점을 이뤘다. 고대 후기 플라톤주의 연구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의 도미니크 오마라 명예 교수 (철학)는 데미우르고스를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이 묘사한 제우스신과 비교하며, 플라톤의 ‘선한’ 데미우르고스는 도덕적으로 개혁된 제우스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그의 후임자이자 플라톤 전문가인 필립 카르픽 교수는 플라톤이 의도했던 것은 단지 그리스의 전통적인 판테온의 ‘개혁’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철학적 우주론에 기반한 판테온의 ‘대체’가 아닌가하는 이론을 제기했다. 플라톤의 세계제작신화를 문자적으로 읽지 않고, 우의적으로 해석할 때 세계 생성의 ‘원인’으로 도입된 ‘데미우르고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제기될 수 있었다. 이 논의는 세계의 이성적 구조 내지 ‘지성적인 설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아울러, 도대체 어떤 존재가 ‘신’ 내지 ‘신적’이라고 일컬어지는지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이번 문명연구 국제심포지엄은 철학과 신학, 역사학, 종교학 및 문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플라톤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만나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을 마련했다. 앞에서 언급한 오마라 교수와 카르픽 교수를 비롯해 호주 멜번 대학 퀸스 칼리지의 데이비드 루니아 교수(역사학), 교부학과 중세철학, 특히 은총론의 권위자인 프라하 챨스 대학의 렌카 카르피코파 교수 (철학), 후기 신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이얌블리코스의 권위자인 미국 스톤힐 컬리지의 그레고리 쇼 교수 (종교학), 더블린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중기 플라톤주의의 대가인 존 딜론 교수의 지도하에서 ‘세계제작자’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칼 오브라이언 박사, 기독교 동방교부인 오리기네스와 니싸의 그레고리우스, 플로티누스의 神正論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미국의 뉴스쿨에서 가르치고 있는 친치아 아루자 교수(철학), 이슬람 시아파 전통과 신플라톤주의 관계를 연구하는 일본 게이오 대학의 신 노모토 교수(문화학) 그리고 서울대 철학과에서 근세철학을 가르치는 이석재 교수(철학), 플로티누스와 플라톤주의 연구자인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문명사업단의 필자가 발표했다.

  이번 국제 심포지엄은 무엇보다도 참석자들의 활발한 토론으로 빛이 났다. 발표자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과 학생들도 토론에 참여하여, 주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데 한 몫을 했다. 이틀간의 행사 기간 동안 참석자들은 ‘함께함’을 통해 생각의 교류를 넘어서 인간적인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다듬어져서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사업단의 영문학술지인 Horizons의 특집호로 편집, 출간될 예정이다.

송유레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서양고대철학)
필자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철학 박사를 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조수(Wissenschaftliche Mitarbeiterin)'를,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 조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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