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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학술상 수상 규정과 한국학의 세계화라는 모순
대한민국 학술상 수상 규정과 한국학의 세계화라는 모순
  • 김신자 Wien대·철학
  • 승인 2011.09.1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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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재외 학자의 편지

김신자 Wien대·철학

"재외 학자에 대한 규정이 바뀌고, 재외 학자들도 정당한 평가를 통해 대한민국 학술상을 수상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재외 학자들의 연구활동을 보는 정부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학의 국제화는 불가능하다."

오스트리아 빈大에서 오랫동안 비교철학(독일철학과 중국철학, 독일철학과 한국철학)을 강의해왔던 김신자 교수(69세)는 지난 2006년 다산학술문화재단 지원을 받아 『다산 정약용의 철학사상』(Das philosophische Denken von Tasan Chong)을 독일어판으로 간행했고, 2010년 10월 영문판(The Phiosophical Thought of Tasan Chong, Translation from German by Tobias J.Koertner/Jordan Nyenyembe, PETER LANG, 2010)을 선보인 바 있다(관련 인터뷰, <교수신문>, 579호, 2010.11.8).

다산학술문화재단과 오스트리안 사이언스 펀드(FWF)지원에 힘입은 이 저술은 유럽 학계에 '다산학'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근 김 교수는 "최근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대한민국 학술상 후보자로 추천하고자 했는데 오스트리아 국적 때문에 안 됐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말하면서, 재외학자들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학의 국제화는 불가능하다는 서신을 교수신문에 보내와 이를 싣는다.

나는 오스트리아의 Wien대학교에서 예술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철학과에서 오랫동안 비교철학 강의를 해왔다. 강의를 하면서 다산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다산 철학을 유럽 학계에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1999년, 나는 당시 학술진흥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다산 철학의 독일어 저술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해 8월, 나는 불의의 사고로 오른쪽 눈을 심하게 다쳤고 세 번이나 수술을 했지만 결국 실명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산에 관한 저술을 계속했다.

다산 철학을 독일어로 유럽학계에 소개

2006년 6월, 다산 철학의 독일어판이 국제적 학술 출판사인 독일의 페퍼랑 출판사(프랑크푸르트)에서 출간됐으며, 이것은 독일어권에서는 최초로 출판된 다산의 관한 책이 됐다. 이 책은 철학의 본고장인 구라파에 다산 철학을 알리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추천도서라는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서평도 이어졌다. 장욱 교수, 가브리엘 교수 두 분은 독일어판을 위한 서평을 집필해줬다.

2007년 1월, 비엔나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책의 출판 기념회와 다산 철학에 대한 빈대학교 철학 교수들의 강연회가 열렸다. 많은 정재계,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다산에 관해 귀를 기울였다.

2008년 11월, 나는 '동서양 사상의 교량-다산의 철학과 유럽철학의 비교'라는 주제로 저명한 철학자들을 초빙해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심포지엄은 학계와 문화계 사람들의 다산 철학에 대한 질의응답과 열띤 토론 가운데 진해됐다. 유럽인들의 의외적인 관심으로 성공적으로 심포지엄을 마칠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대사관의 한 지인으로부터 "대한민국 학술상 후보자로 추천하려는데 국적 때문에 안 됐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분에게 "다산은 한국인이고 나도 한국인이다. 또 다산의 철학을 유럽에 알리고자 이 책을 썼는데 국적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2007년부터 3년 동안 번역가들과 함께 내 독일어판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다. 독일어와 영어로 된 출판을 통해서 다산 철학은 명실공히 독일어권과 영어권에 알려지게 됐으며, 다산 철학의 국제화를 위해서 크게 이바지 하리라 믿고 있다. 이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영어판에 대해 정인재 교수, 푈트너 교수 등이 분석적인 논평을 아끼지 않았다.

2010년 11월, 나는 서울의 친지들과의 모임에서 국적 때문에 수상 후보자 추천에서 탈락한 사실을 말했다. 친지들은 정부의 불공평한 처사를 나무랐고, 내게 항의할 것을 주문했다. 나는 빈에 돌아온 후 이 문제를 거듭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정부의 처사에 대한 재외학자로서의 내 생각을 말하기로 결단했다.

학술연구에 '국적' 따지는 옹졸한 정부

구라파에서는 오히려 해외에서 활동하는, 타국적을 가진 자국의 학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연구업적을 널리 알리며 학술상을 주곤 한다. 국적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학술상 수상의 길을 막고, 재외 학자의 연구 업적을 냉담시하는 나라는 오직 '조국' 한국뿐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일이다. 정부의 옹졸한 처사는 재외 학자들의 한국학 연구 길을 막고, 연구 의욕을 꺾으며, 한국학의 세계화를 가로막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산 철학의 경우, 이것을 철학의 본고장인 유럽에 알리며, 다산을 세계적인 철학자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失明을 무릅쓰고 독일어판과 영어판을 끝까지 해낸 것이다. 그것은 나 개인이 할 일이 아니라 사실 정부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로서는 1999년 당시 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약 1만 달러를 연구비로 받은 게 전부였다. 독일어판과 영어판 출판들은 다산학술문화재단과 오스트리아학술진흥원(The Austrian Science Fund, FWF)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가능했던 일이다. 치명적인 실명에도 불구하고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며, 어려운 일을 해낸 나에게 주어진 것은 타국적으로 인한 수상 후보 배제라는 냉담한 대우 밖에는 없다.

나는 상을 받기 위해서 다산 철학에 관한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자가 연구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서 학술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는다. 학계의 엄정한 평가가 아니라, 국적 문제로 애초부터 논의의 대상에서 재외 학자를 배제하고 제외하는 근시안적 학술정책이 미덥지 못할 뿐이다. 무의미한 규정에 얽매어서 재외 학자들이 상을 못 받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자들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도 국적으로 인한 학술상 후보 배제라는 기상천외한 행정이 근절되길 바라며, 또 그렇게 되길 요구한다.

재외 학자에 대한 국내 규정이 바뀌고, 재외 학자들도 정당한 평가를 통해 대한민국 학술상을 수상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외 학자들의 연구활동을 보는 정부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학의 국제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지금 다산과 서양철학을 비교하는 새로운 저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산의 철학이 유럽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신자 Wien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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