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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9단들’의 사회
‘정치9단들’의 사회
  • 이옥순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1.08.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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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네요. 이 선생을 만나면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좋습니다.”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뒤 헤어지면서 어느 교수가 제게 한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저는 사적인 모임에서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답니다. 정치에 관한 모든 대화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으로 귀결되고,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 간에 심리적 불편함을 야기하기 때문이지요.

가정주부인 대학동창들과 만나도, 집안행사로 온가족이 오랜만에 모일 때도 화제는 어김없이 정치와 정치인, 주로 대통령에 대한 비판으로 흘러갑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모처럼 만났는데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하자!”라고 화제를 바꿉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만든 귀한 시간을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재탕, 삼탕하며 보내고 싶지 않거든요.

자동차가 없는 저는 택시를 자주 이용하는데요, 택시기사들의 편파적인 정치평론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때로 무식한 중년아줌마라고 여기고 과도한‘주입식 정치교육’을 감행하는 적극적인 기사를 만날 때도 있지만,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묵묵히 들어줍니다. 그러면서 은근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다채로운 인생역정과 욕망의 결을 읽습니다.

제 친구들과 가족도 저의 정치적 입장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막연히 짐작은 하겠지만, 아무도 대놓고 물어보지 않았고 저도 제 성향을 표명한 적이 없습니다. 보는 자가 중심인지라 왼쪽에서 보면 저는 오른쪽이 되고 오른쪽에서 보면 저는 왼쪽이 됩니다. 지인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기준으로 저를 좌파, 또는 우파라고 부르고 때로‘아무개당의 끄나풀’이라고 농담합니다. 거기엔 진담이 얼마간 담겨있지요.

그래서 대통령선거나 총선이 다가오면‘회색분자’로 보이는 제게 노골적으로 누구를 찍으라고 연락하는 사람들이 꽤 있답니다. 마치 자신들의 가족이나 인척이 출마한 것처럼 열정적으로 제게‘한 표’를 강요하더군요.“내가 어린애인가요? 나도 판단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선거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나요?”웃으면서 던지는 제 대답에 겸연쩍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 관한 책을 낸 미국의 어느 정치학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밀스럽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대는 것보다‘김 부장입니다.’라고 반(半) 익명으로 말하는 걸 선호한다고요.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인이“탁 까놓고 말하는 걸”좋아한다고도 적었습니다. 비밀스러우면서도 직설적으로 내뱉는 걸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심리적 분열로 보입니다만.

비전문가인 저는 이 모순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정치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드러내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마음대로 욕할 수 있는 최적의 대상이거든요. 사람들은 구경꾼이 돼‘잘 싸우지 않는’링 위의 정치인을 향해 맘껏 소리칩니다. 존재하는 모든 나쁜 건 그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이고, 비가 오지 않거나 비가 많이 와도 그들의 탓입니다.

그 사이로 개개인의 잘못은 묻힙니다.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산디프 판데이의 말을 빌려 고쳐 쓰면, 자기 주변의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반듯해도 그 부당함에 공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안전한 링 밖에서 비판만 일삼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서는 굴욕감이 묻어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좀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조가 섞여있으니까요. 험한 세상의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겐 그저 비판할 누군가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다르게 보면, 우리 사회가 정치에 민감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택시기사에서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입만 열면 정치를 논하는 정치 일변도의 현실은 결국 우리 사회가 정치에 휘둘릴 정도로 단단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요. 시장이나 사무실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정치에 깊은 관심을 두는 건 정치적 변화가 그들의 삶에 위협이 되거나 방어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정치적 권력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이제라도 정치보다 사회가 중심이 돼야겠지

요. 인생에는 다른 영역과 다른 가치가 엄존한다는 걸 인정하면서요. 인도의 한 고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인간은 먼저 왕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다음 아내를 얻고 재산을 모아라. 보호해줄 왕이 없다면 아내와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물론 비판하기 전에 내 가족과 재산을 보호해줄 민주체제의‘왕’을 잘 선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이옥순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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