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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전우익을 기억하십니까?
농사꾼 전우익을 기억하십니까?
  • 배병삼 영산대·정치사상
  • 승인 2011.08.17 11: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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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공자는 누구인가

배병삼 영산대·정치사상
공자사상의 키워드는 仁이다. 다산 정약용이 이 글자를 쪼개 “인이란, 두 사람이다” (仁者, 二人也)라고 정의한 것은 기억해둘만하다. 仁은 사람(人)과 둘(二)로 이뤄진 합성글자라는 것! 여기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나’다. ‘두 사람’이란 나와 상대방, 예컨대 나와 아내, 나와 부모, 나와 자식, 나와 학생, 나와 친구 등으로 형성된다. ‘인은 두 사람이다’라는 선언은, 공자사상의 핵심이 상대방과 관계를 맺고 또 서로 의사가 잘 소통되는 것임을 다산이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 人間은‘사람 -사이’를 뜻한다. 곧 너와 나의‘사이’에‘사람됨’이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 동아시아에서 단독자 즉 개인은 사람이 아니다! 이점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공자가 독재, 독백, 독점, 독선으로 이어지는‘홀로 獨’자를 증오했던 까닭을 헤아릴 수 있다.

편집자로부터‘우리시대의 공자는 누구인가’라는 글쓰기 숙제를 받고 문득 전우익을 떠올렸다. 친구로부터 “이름은 우익인데 만날 좌익만 한다”라는 퉁을 맞았다던 사람. 경북 봉화에서 평생 농사를 짓다가 지난 2004년에 세상을 떴는데, 편지글형식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남겼다.

그와 공자의 관련성은 책제목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논어』첫째 장에 나오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않으랴!”(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경상도 사투리로 바꾸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가 되는 것이다. 전우익이 ‘獨’자를 가지고 이리저리 말놀이를 한 것도, 정약용 만큼이나 공자사상의 핵심을 파지했음을 보여준다.

“세상에 나는 물건을 사람만이 독식해서는 안 되지요. 새와 곤충이 없이 사람만이 산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그런데도 혼자 먹겠다고 야단이지요. 권력이란 것도 돈이나 농약만큼 독한 것이지요. 그걸 몇몇이서 독식하면 금방 끝장나는데도 한사코 독차지하자고 몸부림치는 꼴이 가관입니다.”(전우익, 『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71쪽)

새 책을 보기에도 숨 가쁜 정보화의 시대에 해묵은 고전을 읽는 까닭은 오늘날 고민거리가 옛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발견하는 감회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 전우익이 “그걸 몇몇이서 독식하면 금방 끝장나는데도 한사코 독차지하자고 몸부림치는 꼴이 가관입니다”라며 혀를 찬 권력의 독점 현상도 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2천5백년 전 공자시대에나 매일반인 터다.

 ‘홀로 독’의 반대인 관계(仁)를 이루기 위한 에너지가 德이다. 공자가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논어)라고 했을 때 덕이란 그저 ‘후덕하다’는 식의 인격적 개념이 아니다. 덕은 ‘더불어 살기’위해 상대방에게 내미는 손길의 따뜻함이다.

행복지수 세계최고인 부탄의 지성인 카르마 우라가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의 행복을 믿지 않습니다. 행복은 관계 속에 있어요”(『행복의 경제학』, 10쪽)라던 지적은 곧 행복을 잣는 동력으로서 덕의 특성을 달리 말한 것이다. 중국의 공자나, 부탄의 지성인이나, 이 땅의 전우익이나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공자를 구성하는 또 한 요소가 배움(學)이다. 『논어』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 배움으로 그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제 스스로 아는 것을 한 번도 뻐긴 적이 없고 언제나 배움에 목 말라 했다고 했다. 이른바 “민감하게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도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敏而好學, 不恥下問. 논어)라던 열린 마음이 공자의 또 한 특징이다. 아래위 서열의식이 강한 동아시아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나아가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불치하문’이라는 네 글자는 ‘열린 마음으로 배우기’, 즉 호학의 극치다.

이 대목에서 전우익이 ‘열린 마음’으로 손녀에게조차 배우며 살았다는 전언은 문득 놀랍다. 시인 신경림의 소개에 의하면, “전우익은 거꾸로 배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다섯 살밖에 나지 않은 손녀딸 언년이한테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어떤 때는 그 어린 것이 세상을 더 바르게 알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있다. ‘모두들 가르칠라꼬만 들지 배울라곤 안해요. 나무한테도 그렇고 짐승들한테도 그렇고 아이들한테도 그렇고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요. 전 자리를 멘지 10년이 되는데 참 많은 것을 배워요.’”(14쪽)

손녀에게서조차 배우려 드는 열린 마음가짐이 인간사회로 향할 때, 사회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빚어진다. “이 땅에서 하루 빨리 관광버스가 없어지고 순례자들의 행렬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순례자들은 그들이 지나는 신작로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으며, 그들이 지나가나는 옆 동리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생각할 겁니다.”(61~62쪽)

관광이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대상의 거죽만 스쳐가는 오만한 눈길이다. 반면 순례란 주변사람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면서 그들의 아픔과 질곡을 함께 나누려는 태도다. 그러니까 순례는 仁의 다른 말이다. 공자가 ‘내 주변에서 더불어 함께하기’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게 ‘인’을 이루는 방법인 게지”(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논어)라던 그 ‘주변에서 더불어 함께하기’가 곧 순례의 마당이다. 관광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권력자의 독백, 독선을 상징한다면 순례는 함께· 더불어, 곧 인과 덕의 삶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전우익이라는 사람을 아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헌데 이 익명성 또한 공자와 겹치는 대목이다. 공자도 당대에 불청객으로 살았기에 ‘상갓집 개’라는 평을 들었던 처지다. 그럼에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은 군자”(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논어)이기를 기약했던 사람이었다. 여기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세운 뜻을 실천하려 내딛는 발걸음에 공자다움이 들었다. 전우익도 ‘고집쟁이 농사꾼’이었다. 해방후‘민청’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사회안전법에 연루돼 6년 남짓 징역을 살았던 지식인이면서, 독재와 분단의 시대를 거부하고 고향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제 뜻대로 살다간 사람이다.

우리가 전우익을 잘 몰랐던 것을 되씹어보면, 지금 내 주변에 어떤‘평범한 성인’이 먹물로 가득 찬 나를 넌지시 비웃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남으로부터 배우기는 커녕 남을 가르치려 드는 나의 오만한 태도와, 몽매한 눈길에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이지 싶다. 공자가“날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내 주변의 스승을 알지 못할까 근심하라”고 조언했던 속뜻이.

 

배병삼 영산대·정치사상
경희대에서박사를했다. 『 한글세대가본논어』(1·2)등의저서와 「퇴계 이황이 계곡으로 물러난 까닭」 등의 논문이 있다. 한국 및 동양 고전의 현대와 소통작업, 동양사상에 대한 정치학적 해석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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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 2019-05-09 15:24:42
살아있음이란 따뜻함이다. 인과 덕....사람다움의 근본이고, 휴머니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