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 : ‘마리이야기’ 안시 페스티벌 그랑프리 수상으로 돌아본 한국 애니메이션
[화제] : ‘마리이야기’ 안시 페스티벌 그랑프리 수상으로 돌아본 한국 애니메이션
  • 교수신문
  • 승인 2002.06.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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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7 15:52:22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애니메이션과

안시 페스티벌 장편 부문 그랑프리 수상소식을 접하고 안시를 다녀온 한 프로그래머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게 되었다. “‘마리이야기’의 이미지에 대해 평이 좋았죠?” 그런데 대답이 의외였다. “이미지보다는 이야기에 큰 점수를 받았어요. 관객들 중에 우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구요.” 당혹스러웠다. ‘마리이야기’ 시사와 개봉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언론들은 하나같이 이야기가 취약하다고 지적했는데 안시에서는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는 것 아닌가.

할리우드 스펙타클에서 벗어나기

안시 페스티벌은 1956년 칸 영화제 비경선 부문행사로 시작해 1960년 안시로 옮겨와 애니메이션 전문 페스티벌로 정착했다. 1962년 제 4회 페스티벌에서 존 할라스를 중심으로 ASIFA(국제애니메이션필름협회)가 결성돼 전세계 애니메이터들의 예술적 작품이 모이는 국제적 행사가 되었다. 그 뒤 홀수 년마다 비엔날레로 개최되다 워낙 많은 작품들이 참가하자 1997년부터는 매년 개최되기 시작했고, 보통 2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다. 이런 페스티벌에서, 1999년에야 겨우 본선에 첫 진출한 우리나라 작품이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이다.
“‘마리이야기’의 환상, ‘마리의 세계’는 유년(어린 남우)의 꿈이 아니라 성장한 어른(이성강 감독과 그리고 우리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꿈에 대한 ‘마리이야기’는 보는 사람들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어른들이라면 함께 공유하는 꿈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부재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리이야기’는 기획 초기부터 드라마보다는 이미지, 플롯을 통한 서스펜스보다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려 한 작품이다. ‘마리이야기’를 보아야할 관객들은 자신들의 꿈을 스크린에서 확인해야할 어른들인데 글쎄, 참 어려운 설정이다.”(창작과 비평 2002년 봄호)분명 지루했다. ‘마리이야기’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서사는 지루했다. 피곤한 사람은 졸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조금 졸았다해도 엔딩크레딧을 확인하는 순간 뿌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마리이야기’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함께 공유하는 추억의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루함’인데, 아직까지 우리는 할리우드 스펙터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극장을 찾으면 먼저 스펙터클을 기대한다. 얼마만큼 나를 짜릿한 흥분의 세계로 몰고 갈 것인가에 대한 욕망은 불이 꺼진 뒤 더욱 커진다. 빠른 속도감의 스펙터클을 만나지 못하면 그때부터 무디어진 감정은 미약한 자극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마리이야기’의 수상소식을 접하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대와 전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설명해야하고, 척박한 풍토가 덧붙여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리이야기’의 수상소식을 접하며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삭막한 영상물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지속적인 자극으로 감성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애니메이션을 둘러싼 지금까지의 논의도 어찌 보면 지속적인 자극과 스펙터클의 미학, 산업의 경제학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일제시대 한두 작품이 소개됐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해방 후 미군을 통해서다. 극장에서 개봉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아 1956년 시작된 HLKZ-TV(현 KBS의 전신)의 CF나 극장의 계몽영화 등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겨우 CF 몇 편을 제작한 일천한 경험을 기반으로 (만화가이기도 한)신동헌 감독은 동생 신동우 화백의 인기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극장판 장편 컬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개봉했다. 1967년 1월 21일의 일이다. 서울의 세기극장, 대한극장, 부산의 문화극장, 동보극장, 광주의 시민회관 등 전국의 일류극장에는 ‘홍길동’을 보기 위한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장편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전무했던 우리나라에 몇몇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편 애니메이션인 ‘홍길동’의 성공은 이후 몇 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키지만 허약한 토대와 왜곡된 제작구조는 가능성을 짓밟았다. 10여 년이 흐른 1976년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붐을 기반으로 제작된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 V’가 또 한차례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두 번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제작비 부담이 큰 애니메이션이 다른 부가시장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어린이 관객만을 겨냥해 제작되던 열악한 풍토는 필연적으로 작품 질의 저하와 관객 외면이라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됐다.
두 번째 기회가 무산된 이후 세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방송국의 애니메이션 자체제작이 이루어졌고, TV 애니메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세 번째 기회에 이르러 변화의 조짐이 엿보였다.
애니메이션이 산업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한편 90년대 중반부터 단편 작가들이 탄생했고 젊고 새로운 인력이 애니메이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애니메이션은 세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동희 감독의 ‘OPEN’, 이명하 감독의 ‘존재’가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99년 이성강 감독은 ‘덤불속의 재’를 들고 안시 페스티벌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 뒤 매해 새로운 작품들이 본선에 진출했고, 드디어 2002년 장편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창작환경 조성돼야

이성강 감독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시상식장에서 이름이 호명되면서 화면에 ‘마리이야기’와 제 이름이 실리는데 그저 담담했습니다. 오히려 페스티벌 기간 중 나이든 분들이 울면서 제 작품을 보시며 사인을 부탁하곤 했는데 그게 더 가슴 벅차더군요. 흥행이 아니라 작품성으로 평가받았다는 게 기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마리이야기’를 작품 자체의 성과가 아니라 흥행에 대한 강박관념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면 흥행이 힘들다, 그러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투자가 위축된다, 다음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등등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녔지만 실상 작품에 대한 성실한 관심은 찾기 어려웠다. 반면, 안시는 작품에 주목하고 그 성과를 인정했다.
변화해야 한다. 먼저 작품을 고민하는 풍토가 일반화되어야 한다. 90년대 한때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과 열기는 꾸준히 지속되지 못했다. 애니메이션을 유행의 하나로 인식하고, 산업적 파급효과만을 생각하기보다는 작품 하나 하나의 완성도를 고민해야한다. 그래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창작되고 수용되어지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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