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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와 민주화
히딩크와 민주화
  • 신광영/중앙대
  • 승인 2002.06.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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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대표선수가 돼도 매를 맞나요?”

어느 초등학교 축구선수가 구리 월드컵 한국 대표팀 훈련장을 구경하러 왔다가 한국 축구 대표선수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이 한마디는 한국의 모든 조직과 단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낸 질문이었다.

수영에서부터 농구에 이르기까지, 초등학교부터 프로팀에 이르기까지 감독과 고참에 의한 기합과 구타는 한국 스포츠계에 일상화돼 있다. 심지어 일부 감독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도 선수들을 구타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작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병원의사들이나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선후배 사이에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때로 불미스로운 구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체육학과나 학군단과 같은 조직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심지어 교수들간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군기가 빠졌느니”, “기강이 해이해졌느니” “정신상태가 틀렸느니” 등의 말들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과거 언론에서도 한국 축구선수들이 일본에 패하면 항상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질타하며, 상투적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이겨야 한다”는 “불굴의 투지”를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의 많은 코치들이 아직도 위협과 폭력을 사용하여 선수들을 다그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히딩크는 이러한 전통적인 군대식 훈련과 감독 방식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과학적 훈련과 선수들 사이의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용병술로 선수들의 자발적인 훈련과 최선의 노력을 이끌어 냈다. 과거 한국 감독들이 이룰 수 없었던 그의 과학적인 훈련 덕으로 대표팀의 체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됐다. 또한 특정 학교 출신 선수들을 편애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선수들의 경쟁 심리를 북돋아서 연습과 경기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는 방법을 도입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사문화에 익숙한 한국의 코치들에게 히딩크는 민주사회에서 적합한 새로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감독 방식의 모범을 보여준 셈이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고, 되게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보여준 것이었다.

히딩크는 일제와 군사독재가 남긴 “조선 사람은 패야 말을 듣는다”는 엽전의식을 탈피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축구의 승패를 떠나서 한국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폭력사회 원리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거스 히딩크는 한국의 “사회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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