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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활자 위에 걸린 초승달
그대 활자 위에 걸린 초승달
  • 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 승인 2011.07.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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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남 서평위원/한양대·비교문학
오래 전 한 출판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비평가로 한참 명성을 날리던 모 교수의 글이 그 출판사에서 발행하던 계간지에 실렸다. 문제는 그의 글 가운데 한 글자에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생긴 것이다. 활자에 상처가 생기는 것은 흔히 편집 단계의 마지막에 일어난다. 원고의 최종본을 필름으로 만드는데, 필름 위의 글씨를 새긴 잉크가 편집자나 인쇄소의 실수로 벗겨지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쇄된 종이책에 그 벗겨진 부분이 그대로 희게 나온다.

출판사 사장은 그 활자에 걸린 초승달을 담당편집자의 손톱자국으로 단정하고, 그녀를 호되게 질책했다. 출판경력 몇 년에 아직도 필름관리를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를 옹호하던사람은 그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그녀의 대학 선배였다. 그에 따르면 활자를 가로질러 생긴 초승달 흔적은 손톱자국이 아니라 인쇄소에서 실수로 긁은 자국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입장은 팽팽하게 맞섰고,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담당편집자는 자기는 손톱을 짧게 깎고 다닌다고 변명했지만, 사장의 분노는 잘 식지 않았다.

요즘에는 잘 생길 법하지 않은 이런 해프닝이 10여 년 전쯤만해도 출판계에서는 종종 있었다. 특히 명망 있는 비평가나 작가의 글에 물리적 상처를 내는 일은 편집자로서는 큰 실책에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그만큼 문학과 비평이 당시에 제 기능을 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시대에 대한 성찰로서 지식과 담론의 장으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지금도 본격문학의 영역에서는 문학과 비평은 여전히 중요하고도 심오한 성찰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 정도를 되돌아본다면 계간 문예지와 비평 저널들이 사회적 공론장을 열고, 이끌어가는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상실해온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더 이상‘화두’를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의미 있는‘화두’를 던져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시대분위기인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글자 하나를 훼손하는 정도가 아니라, 문장의 몸통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고 해도 더불어 분노해 줄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인다. ‘문학의 위기’혹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미 많은 시간 토론해왔다. 그리고 해답이 너무 분명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모두들 대체로 답이 없었다. 그리고는 요즘 인문학은 주위의 주목을 끌기 위한 이벤트적 양상을 띠기조차 한다. 왕의 몰락 치고는 많이 씁쓸해 보인다.

이런 저간의 유쾌하지 않은 사정과는 달리 근래 인문학의 주제적 폭이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지고 넓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권위의 아성을 상실한 자리에서 어쩌면 이제 제대로 현실과 대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본격문학의 비평그룹들이 전문적 역량을 배가하고 있다면, 대학의 인문학자들은 사회의 문화적 코드들의 변화를 읽으면서 인문학의 저변을 넓히는 일을 꾀하고 있다. 아직은 암중모색이지만 뭔가 나올듯한 분위기이다.

‘풀뿌리 인문학’이라는 것이 있다면 때로 긁기도 하고, 찢기도 하고, 밟기도 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면 과거 일부 메이저 출판사들을 중심으로 한 비평그룹이나 작가 그룹의 권위에 의존했던 인문학의 힘은 진정한 사회적 공론장을 여는 힘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은 한국 현대 지성사의 한 단면을 이루고 있지만, 부족적 그룹의 이합집산일 뿐, 요즘 인문학에 절실해 보이는 어떤‘저변’에 닿아있지는 않았다.

무책임해 보일지도 모르나 나는 그 ‘저변’이 뭔지는 잘 모른다. 다만 뭔가 부족해 보이는 데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 것, 혹은 명망 있는 비평가의 활자에 상처를 냈던 정체불명의 그 ‘뭔가’?!

이창남 서평위원 / 한양대·비교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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