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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설과 비평의 지나친 탈근대적 성향이 불편한 이유
최근 소설과 비평의 지나친 탈근대적 성향이 불편한 이유
  • 한기욱 인제대 교수
  • 승인 2011.07.1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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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_김형중 교수의 반론(<교수신문>608호)에 답하며

한기욱 인제대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게재한 평문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에서 김영찬, 김형중 두 평론가를 거론하면서 이들의 단절론적 근대문학사 인식과 장편소설 불가능론을 비판했다. 이에 김형중 조선대 교수(국어국문학과)가 반론(교수신문, 608호, 2011.7.4)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한기욱 교수의 분석과 주장을 가리켜 "온당한 제안이지만 구체적 분석이 결여됐다"라고 반박하면서 한 교수의 장편소설론이 "'구체와 보편의 변증법'으로 요약 가능한 루카치 시대의 '장편소설론'에서 얼마나 진척된 내포를 포함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최근 소설과 비평의 지나친 탈근대적 성향을 우려하는 이유를 제시하면서 김 교수의 반론에  재반론을 제기했다. 두 평론가의 시각 속에는 한국 근대문학사와 장편소설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유의 평행점이 내재해 있긴 하지만, 생산적 토의를 통해 공분모를 읽어내기 위해 한기욱 교수의 반론을 게재한다.

 

필자의 평문「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에 대한 김형중의 반론을 관심 있게 읽었다. 서로의 입장이 판이함을 재확인하면서도 ‘비평적 소통 가능성’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의 쟁점에 직핍하지 않고 필자의 평문을 “이른바 민족문학 계열 논자들의 글에서 자주 발견되는바, 한국 문학에 대한 일종의 부정 신학적 논법”으로 규정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쉽다. ‘민족문학’에 대한 그의 독법이 그리 깊지도 않거니와, 그 문제가 당면한 쟁점도 아니지 않은가. 주요 쟁점에 초점을 맞추고 상대방이 실제로 발언한 말의 진의를 헤아리며 토론한다면 서로의 입장 차이뿐 아니라 공통된 지점도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반론을 읽어보자.

 

우선 그와 김영찬의 단절론적 문학사 인식에 대한 비판을 두고 “수긍할 지점들이 없지 않다”고 인정한 것이라든지 “‘근대문학’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차원에 매이지 말고 작품 하나하나의 진가를 사주는 일에 초점을 두자”라는 나의 제언을 ‘온당한 제안’으로 받아들인 것은 고무적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인정은 아니다. “그런 비판의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온당한 제안을 해놓고도” 필자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비평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가령 작금의 한국소설을 이해하는 데 왜 ‘87년체제론’이 ‘97년체제론’보다 나은 이론틀인지를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으며 ‘작품 하나하나의 진가를 사주는 일’도 실제 작품 분석을 통해 제시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작품 하나하나의 진가를 사주는 일’을 제한된 범위에서 가능한 만큼은 시도했다는 것-가령 박민규의 ??핑퐁??에 대한 김영찬의 독법의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알아보는 독자도 있기를 기대한다.

3D와 스마트폰 시대의 (장편)소설?

김형중은 단절론적 문학사 인식이 장편소설 회의론과 맞물려있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되, ‘장편문학은 여전히 근대문학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영미문학과 우리 문학의 여러 전거를 대면서 장편소설이 여전히 우리 문학에 유효한 형식임을 길게 논한 필자로서는 섭섭한 대목이다. “유기적인 인과와 총체성이 묘연해져 버린 우리 시대에도 전통적 의미에서의 장편소설이 가능한가?”라고 다시 묻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런 취지로 답한바 있다.‘전통적 의미에서의 장편소설’과 ‘그 이후의 장편소설’을 나누어 후자는 장편소설이 아닌 별개의 장르인 것처럼-‘브리꼴라쥬’처럼-단절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런 입장이 자의적임을 19~20세기 영미소설의 창조적 계승 사례를 들어서 비판했다.

그런데도 김형중은 “단편소설은 무엇이고, 장편소설은 무엇인가? 아니 3D와 스마트폰 시대에 소설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반복한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발본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그는 장편소설이 설자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 물음이 유효한 지역은 지금으로서는 일본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1990년대 이후 일본문학은 컴퓨터게임, 인터넷, 휴대전화가 소설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게임리얼리즘’이라는 개념과 ‘캐릭터 소설’이라는 장르가 등장하고 ‘게이따이소설’(携帶小說), 즉 ‘휴대전화 소설’이라는 장르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려왔으니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며 문학판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은 이런 가벼운 새 장르들에 의해 진지한 문학들이 밀려나는 조짐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을 추종하는 한국의 비평가들은 그가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을 오락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한 대목에 대해 경각심을 지녀야 마땅하다.

탈근대적 상상력과 근대극복의 길

다행한 것은 일본문학의 상황이 예외적이며 한국소설이 일본소설의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새로운 행로를 보일지 미정이라는 점이다. 급성장하는 중국소설의 복잡다기한 변화도 중요한 변수이며, 특히 장편 형식의 다양한 실험은 예의주시해야 할 사안이다. 최근 중국소설은 경직된 사실주의 형식에서 벗어났으되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상당한 예술적 활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지역의 문학들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특정 지역만을 모델로 삼아 장편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몰아갈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닫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열린 미래’를 위해서 ‘전통적 의미에서의 장편소설’이라는 고정된 형태를 굳건히 지키자는 것이 아니다. 그 소중한 유산과 핵심적인 특성을 물려받되 이 문학형식의 예술적 혁신을 위해 분투하자는 뜻이다. 장편소설이 지금 이곳에도 유효한 최고의 문학형태로 남기위해서는 옛것의 고수가 아니라 하루하루 달라지는 삶의 형태에 대응하는 예술적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근대와 함께 발전해온 장편소설 형식이 영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김형중 못지않게 필자도 발본적이다. 가령 “당위와 근거없는 낙관이 어떤 장르의 기복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복잡한 매개를 거치더라도, (?…) 최종심에서는 토대가 소설 양식을 구축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이때 ‘토대’는 3D와 스마트폰 같은 과학기술적 혁신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지각 방식과 감수성의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조건 짓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에 기초한 근대 세계체제이다. 전자는 그 자체로 놀라운 혁신이고 일정한 양식의 변화를 동반하지만 후자의 체제 속에서 일어나는 계기들 가운데 하나인 만큼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의 본질적인 성격을 바꿔놓지는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장편)소설은 3D와 스마트폰뿐 아니라 사진과 영화, 라디오와 텔레비전, 인터넷과 휴대폰 등의 전자매체의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소설은 이들 매체와 경쟁하면서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그 경험을 자양분으로 흡수하면서 진화해왔다. 물론 소설의 독자 수와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현실과 개인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적 진실을 탐구하는 형식으로서 장편소설은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근대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데도, 근대 ‘체제’가 부과한 질곡에서 벗어나는 데도 종요로운 예술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김형중과 필자의 차이가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지점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평가에서이다. 그의 말마따나 개별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두 작품은 두 작가의 문학적 행보에서는 가장 성취도가 낮은 작품들”이라고 심하게 비판할 때에는 적어도 그 근거를 댈 필요는 있다. 김형중이 새로운 소설 형태로 주목한 “이장욱의 입체적 소설쓰기, 윤성희의 퀼트적 소설쓰기”를 필자 역시 중요한 성과로 꼽지만 신경숙과 박민규 장편의 전면적인 성취에는 못 미친다고 판단한다. 근대체제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거기서 벗어나려는 ‘탈근대적’ 충동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작금의 문학에서 ‘탈근대적’ 상상력이 부재하다면 그것은 ‘건강한’ 예술의 징후가 못된다. 그렇지만 ‘탈근대적’ 충동에 휩쓸린 나머지 마치 근대가 끝난 것처럼 근대적 삶과 예술의 형식들을 무차별적으로 해체하거나 내동댕이치는 것은 그 형식을 때론 활용하고 때론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예술적 방식이 아니다. 내가 최근 소설과 비평의 지나친 탈근대적 성향을 비판하는 이유다. 

한기욱 인제대 영어영문학과

한기욱 인제대 영어영문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최근 평문으로「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역서로는 『필경사 바틀비』, 『미국 패권의 몰락 : 혼돈의 세계와 미국』(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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