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0:45 (목)
어느 출판평론가를 위한 悲歌
어느 출판평론가를 위한 悲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07.04 14: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한 권으로 재출간한 사연

 

 

한 사람의 눈으로 숱한 사상가들을 살펴보는 일이 가능할까. 사상가들이 그려낸 사유의 전체 지도를 따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유를 농축한 책을 통해서는 가능할까. 출판평론가 최성일이 그런 일을 해왔다. 지금 그는 뇌종양으로 힘겹게 투병하고 있다. 의식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출판평론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그는 1997년 7월 야심찬 기획을 시작했다. 책을 통해서 20세기의 사상가들과 현재진행중인 세기의 사상가들을 리뷰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리뷰가 2010년 9월까지 이어졌다. 그가 만난 사상가들은 가라타니 고진에서부터 한나 아렌트, 후지와라 신야 등 218명. 이 가운데 한국인 저자로는 고종석, 김기협, 우석훈 등 10명이 있다. 꼬박 13년 2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다섯 권의『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로 세상에 나왔다. 리뷰를 진행하다 2006년 그는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이 악물고 글을 썼다. 2011년 1월 겨울 그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리고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뒤늦게 알게 돼 더 마음이 아프다"라는 글을 올려 그의 투병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대표가 앞장서 이 방대한 다섯 권의 책을 한 권으로 재구성했다(『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6). 전체 792쪽으로 분량이 제법 나간다. 제호는 같지만 부제( '우리 시대 사상가 218인의 생각 사전')를 덧붙였다. 뜻밖이지만 적절한 명명이다. 군더더기 없이 바로 '급소'를 치는 최성일의 스타일로 본다면, '생각 사전'이라는 부제는 절묘하다.

정밀한 독서에다 자기만의 촌철살인의 논평을 구가했던 이 재기 있는 출판평론가가 선택한 리뷰 대상은 해외 사상가의 번역서를 중심으로 ‘필자의 개인적인 취향+저서 또는 번역서 2권 이상’이라는 기준에 따라 선별했다. 국내에 소개된 사상가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그가 진행한 13년의 리뷰는 한국 출판계에서도 전무후무한 작업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기호 대표는 "학자들의 이론적 서술에서 벗어나 리뷰어이자 독자의 입장에서 펼쳐놓은 최성일의 솔직하고 시원스런 문장이 주는 쾌감이 읽는 맛을 더한다"라고 그를 평했다. 거기에다 최성일의 지적 엄밀성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는 한국 아카데미의 저술이 지적 엄밀성뿐만 아니라 독창성이나 깊이 면에서 많이 뒤져있다고 늘 지적해왔다. 번역서들의 세계를 엿보면 이중의 취약점이 보인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악평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출판평론가 최성일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를 위해 번역서의 지적 수준, 한국어 문장의 완결성 등을 척도에 놓고 독서의 그물을 내렸다. 인류에게 새로운 생각의 방향을 제시한 철학자는 물론 작가, 역사학자, 정치학자, 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상가들의 생각을 단순히 요약하고 정리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와 관련된 책을 알려주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자료를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꼼꼼하게 짚었다. 물론 그의 독서 취향도 반영돼 있다. 반다나 시바, 레이첼 카슨, 토다 키요시 같은 생태 사상가를 우대한 것이 그렇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절판된 책 가운데 새롭게 출간할 만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는 책들,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은 책 가운데 하루빨리 번역 출간됐으면 하는 책들도 밝혀놓았다. 사상가와 번역자, 관련 도서와 인물 사이의 맥락을 찾는 데 도움이 되도록 ‘책명 찾아보기’와 ‘인명 찾아보기’를 꼼꼼하게 작업했다.

 한기호 대표는 "이미 출간했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다섯 권을 한 권으로 갈무리하면서 빛바랜 내용이나 사적인 부분은 들어내고, 서지사항은 현 시점을 기준으로 다시 확인해 보충·보완했다"라고 밝혔다. 이번에 출간된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판매 수익금 전액은 투병중인 최성일 씨의 가족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 이 기사를 쓴지 30시간 뒤인 7월 2일(토) 밤 8시 50분,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는 44년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13년 동안 그가 밀고나갔던 글쓰기는 이제 출판역사의 흔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의 외부에 존재했지만, 그의 작업은 아카데미의 연구자들에게 좋은 표지석이 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