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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벤야민과 함께 사유하기
동시대를 벤야민과 함께 사유하기
  • 강수미
  • 승인 2011.06.16 2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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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미 지음, 『아이스테시스-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글항아리, 2011.5)

1990년대 일상의 정치경제학과 그 무대로서 대도시, 인간과 자연의 현존을 재편하는 핵심 기제로서 하이 테크놀로지, 메시지 전달의 도구를 넘어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된 미디어, 문화산업의 구도 하에서 자의든 타의든 유미주의 세계를 벗어나 사회 현실과 긴밀해진 예술. 그리고 진보가 아니라 파국으로서 모더니티. 이런 화두를 모더니즘 프로젝트의 실패와 탈 근대사회의 무수한 난제 속에서 비판적으로 숙고할 필요가 대두됐을 때, 국내외 학계는 새삼 발터 벤야민에 주목했다. 그는 모더니즘의 분과학문체계가 엄격히 작동하던 20세기 초중반 이미 강단철학과 관념론미학에 고정되지 않고, 아방가르드예술 비평 ․ 도시문화연구 ․ 언어이론 ․ 경험이론 ․ 매체이론 ․ 역사철학 ․ 인간학적 유물론 연구를 횡단하며 기존의 학계가 제기하지 않았고 답할 수 없었던 문제를 짚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저작들은 통섭의 지식과 학제 연구를 지향하는 우리시대가 참조할 인식내용 및 연구방법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구자들은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두고 서구 근대의 에피스테메부터 건축 또는 패션의 미시사까지 논할 수 있었다. 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는 유물론적 예술이론과 매체미학의 선구적 지식 모델부터 동시대에 유효한 영상이론의 세부 논점까지 추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20여 년간 가히 ‘벤야민 르네상스’가 공허한 수사가 아닐 정도로, 다방면에 걸쳐 벤야민의 지적 성과를 오늘의 학문과 문화예술 장(場)에 이행시키는 연구들이 봇물 터지듯 도출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바야흐로 이 같은 분위기가 불 지펴질 즈음 필자는 벤야민의 미학을 연구해 들어갔다. 이때 원전과 더불어 유럽과 영미, 국내에서 발표된 벤야민 관련 연구들을 참조했음은 물론이다.

일관된 사유체계와 방법론

하지만 참고문헌으로 삼은 선행연구들은 많은 경우 벤야민의 특정 저작과 주요 개념을 꼽아 독해하고 분석하는 데 집중하면서, 그 논리 전개의 전제이자 기반이어야 할 벤야민 사유의 전체 체계와 방법론에 대한 해명은 불충분한 상태를 답보했다. 이는 필자가 벤야민에게서 파악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일견 ‘정통 철학의 체계를 벗어난 단편의 철학자’ 혹은 ‘파편적 현상들을 비의적이지만 독창적인 文彩로 서술한 평론가’처럼 인지된다. 하지만 벤야민의 초기 논고부터 후기 저작까지 그 내용들을 교차하고 문맥을 재구성해볼 경우, 우리는 그 사유가 고유한 내적 체계와 서술의 방법론으로 실행되었음을 안다. 이를테면 그는 ‘미래철학의 프로그램’을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제기한 때부터, ‘17세기 독일 바로크 비극’을 중심으로 한 미학이론과 ‘20세기 초 독일 부르주아지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아포리즘을 동시에 내놓은 시기를 거쳐, ‘19세기 파리의 잡다한 사물더미’로 모더니티의 실재를 재구성하고 ‘오늘날 예술의 운명’을 유물론의 시각에서 논한 지점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사유 지도가 그려지는 이론가인 것이다.

『아이스테시스-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은 벤야민이 기존 형이상학의 인식을 비판한 초기 철학 논고에서부터, 근대의 변화된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지각 양태를 근거로 새로운 예술의 정체성과 기능을 급진적으로 제기한 그의 후기 유물론적 예술이론까지를 내재적으로 재구성하고 구체적 논점을 탐색한 벤야민 연구서이다. 전체 4부, 총9장으로 구성된 책의 제1부가 “이념, 극단, 진리, 서술”이라는 논제 하에 벤야민의 여러 이론들을 지형화하고, 사유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데 할애된 것은 위와 같은 문제인식에서 비롯됐다. 우선한 논점은 벤야민의 사유가 철학 내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역사현실의 가장 소외되고 예외적인 현상들까지 진리 서술의 고찰 대상으로 삼아 종합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거기서 신학 ․ 형이상학 ․ 역사철학 ․ 유물론 ․ 지각이론으로서의 미학은 분리되지 않고 내밀한 관계로 엮여있다. 이러한 사유와 이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책은 벤야민 고유의 사유와 서술 방법론을 그의 기술(Technik) 개념, 알레고리와 수집, 모더니티에 대한 변증법으로서 꿈과 각성, 몽타주를 논제로 해서 설명한다.

더불어 이 책은 미학에서 벤야민 이론의 특수성을 분명히 하고, 개별 논점과 그 지적 의의를 보다 정확하고 수월하게 오늘의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는데, 그 내용이 본문 2부에서 4부까지 주를 이룬다. 벤야민은 20세기 모더니티와 산업기술의 시대에 예술의 문제를 테크놀로지, 인간 지각과 경험, 사회 집단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현존, 그리고 강압과 착취가 없는 유토피아적 미래의 현재화라는 테제와 연결시켜 통합적으로 논했다. 이를 근거로 『아이스테시스』는 벤야민의 미학이 단순히 분과학문으로서 미학 내부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적 지평에 자리한 ‘모든 지각에 관한 학(學)’임을 밝히고자 했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책의 제목인 ‘아이스테시스’는 벤야민이 언급한 적이 있는 고대 그리스어 어원으로서 ‘미학’이다.

예술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 가능성

이 책은 이상과 같이 밝힌 연구와 저술 배경에 따라 각 장의 주제를 일종의 ‘구심적 구조’가 되도록 배치했다. 즉 가장 포괄적인 주제인 벤야민 철학과 미학의 체계 및 방법론을 제1부에서 선제적으로 해명하고, 그 해명의 힘이 촘촘히 작용해 2부에서 벤야민의 모더니티 연구와 역사철학을 이해하고, 3부에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지엽적으로 보지 않게 하며, 4부에서 벤야민의 인간학적 유물론과 지각이론으로서의 미학이 보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드러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벤야민 철학과 미학 내에 갇힌 채 논의를 끝내지는 않는다. 마지막 장은 벤야민 이론의 미학적 성과와 한계를 짚고, 푸코, 보드리야르, 비릴리오, 플루서 등 동시대 철학, 예술론, 사회과학, 매체미학과 교차하는 담론 생산 공간을 열어뒀다.

 벤야민이 당대 미학에 ‘지각이론으로서의 미학’을 요청한 것은, 예술이 무엇보다도 억압받는 집단의 행동을 촉진시켜 파국의 역사적 현재를 그들 스스로 변혁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인식에서다. 그가 1920년대 후반부터 크게 참조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사회관계의 변혁을 정치경제의 재편에서 찾았다. 하지만 벤야민은 예술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타진했다. 문화와 예술이 곧 고부가가치 산업의 다른 이름이고, 테러는 불특정 다수의 일상이며, 글로벌 자본주의 하에서 극단적 빈부격차는 당연한 논리가 된 이 시대를 깨뜨릴 비범한 사유 모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강수미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필자는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로는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서울생활의 재발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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