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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미술관’인 전각은 왜 燕寢영역에 마련했을까
‘도서관+미술관’인 전각은 왜 燕寢영역에 마련했을까
  •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 승인 2011.06.0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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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궁중 서화컬렉션을 말하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를 지나 일제강점기까지 존재했던 궁중의 그림과 이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총망라한 『왕과 국가의 회화』(한국학중앙연구원|박정혜·윤진영·황정연·강민기지음, 돌베개, 2011)가화제다. ‘ 궁중회화’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인 왕실에서 그려지고 향유됐던 그림과, 최고 권위와 공적 개방성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궁궐에서 주관해 제작된 모든 그림을 뜻한다. 저자들은 이 궁중회화의 제작 목적과 용도, 제작자와 향유층을 고려해 일곱 가지로 분류하면서 논의를 진행했다. 2부에서는 아주 특별한 주제, 왕과 왕족들이 감상하거나 직접 그렸던 그림들도 분석했다. 세종, 숙종, 영조, 정조, 헌종 등의 회화 관련 업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3부에서는 왕실이 직접 운영했던 회화 컬렉션의 구체적인 상황, 이를 보관했던 궁궐의 전각과 관리체계 등을 살폈다. 4부에서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왕실미술을 다뤘다. 집필에 참여했던 황정연 학예연구사를 통해 조선왕조의 궁중 서화 컬렉션의 의미, 궁중미술관과 수장품, 컬렉션의 역사, 문제점 등을 짚어본다.

그림2. 김두량·김덕하합작, ‘ 春夜桃李園圖’의 부분, 1744년, 견본담채, 8.4×184.0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영조가창경궁일녕헌에서감상한그림
전제왕권체제였던 조선에 있어 국가와 다를 바 없었던 왕실은 이상적인 유교사회 건설을 추구하고자 여러 분야에 걸쳐 치밀하고 정교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다. 이 중 하나로 국가경영에 필요한 각종 서적과 그림과 글씨 등을 모아‘궁중 컬렉션’을 형성한 것을 들 수 있다.

궁중 서화컬렉션이란 국가적인 차원에 의해 또는 왕실 구성원들이 사적으로 모아 궁중에 보관한 收藏品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다양한 목적으로 서화작품을 수집하고 보관하였다. 국왕중심의 국가에서 왕은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존엄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전해주는 초상, 글, 글씨, 그림이 일차적인 보관의 대상이 됐다. 즉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御眞과 이들의 그림과 글씨를 일컫는 御筆은 시기를 불문하고 왕실에서 가장 소중하고 경건하게 보관하는 대상이었다.

이밖에 왕실에서는 국정운영에 활용하고자 국내외로부터 서화를 적극적으로 입수해 구비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교서관이나 도화서에서는 궁중 書寫와 圖繪업무에 참고할 善本작품을 비치해 두고 참고 자료로 이용했다. 유명 서화가의 작품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접대 또는 선물용으로 쓰이기도 했고 대마도, 괧球國(오키나와) 등지로 보내져 대외적인 친교의 의미로 사용됐다. 개인 컬렉터가 사적으로 수집한 작품과 비교했을 때, 조선 궁중에 소장됐던 서화가 구별되는 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집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 문화정책의 대표성을 표방한 것이라는 데 있다. 궁중 컬렉션은 왕족의 서화애호, 후원자로서의 역할, 당대 서화계와 문예사의 흐름을 왕실에서 수용해 형성되기도 했지만 국가정책상 필요성이 수반됐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궁중 미술관과 수장품

그림1. ‘東闕圖’에 그려진 奉謨堂의 모습, 19세기 초, 고려대 박물관 소장.
조선 궁중에 수장된 예술품으로는 왕과 왕비의 초상인 어진, 그들의 글씨와 그림인 어필·御畵, 일반 서화가들의 작품, 서예가들의 흔적을 담은 금석문의 탁본 등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멋있는 조각품과 각종 器玩 골동품 등은 예술품으로서 특별히 수장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서화가 산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전각을 설립하여 보존하는 것이었다. 당시 藏書處와 收藏處로 쓰인 전각은 작품을 잘 보존하고 유실을 대비한 수장고의 개념이었다. 오늘날에는 서책과 서화를 다른 개념으로 인식해 도서관 또는 미술관으로 수장공간을 분리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한 장소에 서책과 서화를 함께 보관한 것이 상례였다. 곧 하나의 전각이 도서관이자 박물관, 미술관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목적의 전각은 수장품의 성격에 따라, 국왕의 초상화를 奉安한 眞殿, 국왕이 창작한 서화를 봉안했던 尊閣, 그리고 기타 서화를 보관했던 전각으로 구분된다. 진전은 이미 15세기부터 건립돼 가장 역사가 오래됐으나, 대부분 화재로 손실돼 현재는 창덕궁 璿源殿과 전주의 慶基殿만 남아 있다.

조선 列聖의 墨蹟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奉謨堂은 본래 17세기에 국왕의 글을 보관한 天翰閣과 御製閣에서 출발해 1776년 영조의 어필을 봉안하기 위해 정식으로 건립됐고 1911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기까지 조선왕실의 대표적인 존각으로 이용됐다(그림1). 이밖에 국내외 역대 유명 서화가들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 여러 전각이 건립됐다. 숙종이 열성어필과 그림족자와 병풍을 보관했던 청덕궁의 珍藏閣과 淸防閣을 비롯, 영조의 日閑齋, 정조가 건립한 창덕궁 규장각 일대, 그리고 19세기 궁중 서화수장의 중심처였던 창덕궁 낙선재의 부속 건물들과 경복궁 후원 지역에는 국왕의 서화취향에 따라 다양한 서화작품이 수장되면서 왕실의 문화적 역량을 상징한 대표적인 공간으로 쓰였다. 이러한 궁중의 서화수장처는 관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한 燕寢영역, 즉 왕과 왕비가 사적인 생활을 영위한 곳에 주로 마련돼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왕족이 자신들의 한묵취향을 도모하고 귀중한 서화를 왕족의 생활권과 밀접한 영역에 비치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서화컬렉션의 역사

*숙종의 어람용.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궁중 서화컬렉션이 파괴된 후, 숙종(재위 1674~1720)은 피폐한 왕실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궁중 서화수장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개창했다. 이후 영·정조연간(1724~1800)을 거치면서 제도적으로 정비됐으며, 한종~철종연간(1834~1863) 동안 방대한 서화 컬렉션이 형성·유지될 수 있었다.

숙종연간의 궁중 수장품이 後繼王代로 온전히 전래됐다는 증거는 희박하지만 몇몇 사례로 볼 때 18세기 궁중 수장의 기본적인 토대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영조가 왕세제 시절 모은 수장품 목록인『日閑齋所在冊置簿』에 수록된 약 56점에 달하는 선왕의 어필과 윤두서(1668~1715), 李明郁(17세기) 등 우리나라 서화가들의 작품 중 일부가 숙종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든지, 영조와 정조가 즐겨 감상한 서화작품 역시 숙종의 어람용 서화였다는 점이 그 증거이다(그림 2, 3).

숙종년간 궁중 수장품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 조선후기 궁중 서화수장은 정조연간(1776~1800)에 이르러 체계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정조는 1776년 창덕궁에 규장각과 그 부속 건물들인 宙合걹, 閱古觀, 皆有窩등의 건립을 명해 국내외 서책과 어제어필, 기타 서화가 집중적으로 보관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창덕궁 규장각과 주변 전각들을 중심으로 한 서화수장의 전통은 19세기로 계승돼 조선말기까지 궁중 내 주된 수장품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18~20세기 초에 작성된 각종 수장목록 대부분이 규장각 주변에 있던 전각을 대상으로 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서책, 청 황실의 서화자료, 역대 유명 서화가들의 작품과 畵譜 등이 다량 유입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서화수장 제도는 19세기 들어와서도 여전히 중요한 전통으로 계승됐다. 순조(재위 1800~1834)와 孝明世子(1809~1830), 헌종(재위 1834~1849)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나 창덕궁의 春坊, 觀物軒, 演慶堂, 樂善齋, 古藻堂등지에 많은 서화작품이 비치됐다. 특히 서화취미가 강했던 헌종은 창덕궁 承華걹에 약 884점의 중국 및 우리나라 서화작품을 수장해 19세기 말 궁중 컬렉션의중요한 모태를 이루었다. 한편, 고종은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緝敬堂과 集玉齋를 건립, 이곳에 1천여 점 이상의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최신 서적과 서화 작품을 수장했으나, 20세기 초 왕실자료를 점유한 일제통감부에 의해 귀중 서화는 대부분 유실되고 말았다.

남은 문제들

이 짧은 글 안에 조선왕실 서화수장의 방대한 역사와 규모를 담기란 무리가 있지만, 궁중 컬렉션이 유교정치에 입각한 문화적인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국가정책이자 왕족들의 서화취미와 미술후원, 당대 예술사가 반영된 가장 포괄적인 집약체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궁중에 수장됐던 작품이 문중이나 개인이 수집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이었지만 대한제국기의 격동기 속에서 상당수 유실됐다는 점이다. 일제 통감부는 1910년 국권을 침탈하기 전부터 이미 조직적으로 궁중 소장 자료를 조사했고 이 과정에서 귀중한 왕실서책과 서화, 옥새 등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데라우치 마사다케(山內正毅)를 비롯한 총독부 관리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물론 궁중 전래품 중 일부가 현존하고는 있으나,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자료 발굴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수집경로와 상관없이 기왕에 수집된 작품들도 잘 보존해야겠지만 사라진 궁중 서화수장품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해외로 반출됐거나 국내에 흩어진 작품들을 찾아 한 자리에 모아 놓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실행돼야 한다.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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