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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없다?!
인문학은 없다?!
  •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 승인 2011.06.07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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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단상] 최성만 이화여대 독문학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사람들에게서 습관과 주의력은 서로 반대되면서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주의력 없는 습관은 자칫 맹목적인 것으로 물화되고, 습관이 되지 않는 주의력은 예민한 그만큼 일시적인 것이기에 산만하게 흩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인문학을 이야기할 때 주의력을 집중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진정한 인문학은 주의력이 아니고 습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인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거리처럼 늘 생각하고 경험하는 익숙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인문학은 없다’는 명제를 떠올려본다. 이 명제는 그 뒤에 어떤 문장이 이어지냐에 따라 얼굴이 확 달라진다. 예를 들어,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날 실용주의가 팽배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나날이 온갖 경쟁과 시간압박 속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경쟁 속에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시간, 권력, 돈 등에 끌려가는 삶을 살아간다. 심지어 그런 의식도 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카프카의 단편 『변신』의 주인공처럼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적 삶을 망각하고 억눌러 온 데 대한 처벌이다. 물론 주인공인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변신한 뒤 회사에 갈 수 없게 되면서 집에서 많은 시간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성찰의 시간과 공간을 비로소 그러한 끔찍한 변신 덕택에 얻게 되는 것이다.

한편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인문학은 없다’는 명제에 이어질 또 다른 문장을 떠올려본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가 그것이다. 인문학은 인문학이라는 제도와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치, 교육, 예술, 종교 등 사회의 여러 분야와 일상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명제는 ‘인문학이라는 (별도로 경계가 정해진) 영역이란 없다’는 뜻이다. 위의 명제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문학은 없다. 단지 인문학적 사유와 경험이 있을 뿐이다’가 될 것이다.

인문학은 요즘 학문으로서는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인문학과 관련된 서적과 프로그램과 행사는 다양하게 넘쳐흐르고 있다. 인문학 관련 서적이 역사상 오늘날처럼 풍부하게 출판된 적이 없다. 그리고 좋은 인문학 서적은 학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현재의 삶과 관련된 최근의 이슈들과도 통섭하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된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 한 예다. 그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와 자유와 평등에 관한 옛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적 이슈들과 대결시키면서 현재화시킨다. EBS에서 최근 방영된 그 교수의 하버드대 강의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그것이 그 교수와 책의 매력이다. 샌델 교수는 논의가 한참 불이 붙을 때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라는 말로 청중의 궁금증과 관심을 붙잡아 두며 끝낸다. 인문학을 연속극이나 연재소설처럼 드라마화 하고 있는 것이다. 몸에는 이롭지만 입에는 쓴 인문학이라는 약을 糖衣를 입혀 제공하는 그의 기술은 사람들에게서 감탄을 자아낸다.

무릇 평판이 좋은 경제학, 여성학, 심리학, 정치학 책들은 반드시 인문적 요소를 담고 있다. 게다가 텍스트는 언어로 쓰여 있는 이상 적나라한 사실들을 다루는 내용 이외에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문체와 수사학이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또한 오늘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말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의학과 생물학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통섭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통섭의 시대에 살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정치학의 경우 정치학과에서는 정치에 관한 기능적 지식을 주로 배우지만 인문학에서는 ‘정치란 무엇인가’ 등 정치철학을 배울 수 있다.

요컨대 우리의 삶을 다루는 토픽들에는 인문학적 지식과 경험이 반드시 들어 있다.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없으면 우리는 실증주의, 실용주의, 기능주의, 과학주의로 흐르면서 단편을 전체로 오인하게 된다. 인문학적 경험은 바로 그러한 분과학문적 지식의 독단과 위험성을 경고한다. “인문학은 없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최성만 이화여대ㆍ독일문학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으로 박사를 했다. 벤야민, 아도르노, 미메시스, 해체론 관련 논문을 다수 썼다. 벤야민 선집 번역을 기획,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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