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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 이후 세대'에게 학문이란 무엇일까
'발전 이후 세대'에게 학문이란 무엇일까
  • 윤대엽 연세대 정치학
  • 승인 2011.06.0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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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윤대엽 연세대 정치학

윤대엽 연세대 정치학
학문이란 현상과 인식의 끊임없는 줄다리기다. 현상이야말로 학문의 출발점이지만 개인적, 사회적, 더구나 인간적 한계로 인해 인식은 현상과 끊임없는 격차를 가진다. 때로는 지혜로운 인식이 보이지 않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현상과 인식의 끊임없는 논쟁 가운데 어디서 어떻게 공부하는가라는 ‘학문의 방법’의 문제 역시 여전히 중요한 화두이자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가난했던, 그래서 근대화의 열망이 지배하던 시대 유학은 어쩌면 유일한 학문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성공한 서구 근대화를 학습하고 모방하는 것이 학문적 인식의 목표였고, 이러한 인식은 한국 사회 전반의 발전주의(developmentalism)를 지배했다. 무엇보다 학문의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던 현실에서 유명한 학자와 필요한 자료, 공부하기 좋은 환경은 유학열풍의 이유였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이 이룩한 압축적 발전은 서구를 모방하고 추격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치, 경제, 경영은 물론 문학과 예술 등 사회과학의 패러다임을 지배한 것도 외우기를 통해 서구의 지식을 습득하고 모방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서구로부터의 학습을 통해 인식됐던 한국과 동아시아의 현실을 학문의 식민지성으로 규정했지만, 어찌 됐건 근대화 세대에게 학문의 의미는 남의 것을 배우고 추격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70년대 이후 출생해 90년대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는 종종 ‘발전 이후 세대’로 불린다. 가난한 근대화시기에 유년기를 보내느라 이승만과 박정희를 알지 못했다. 민주화로 치열했던 80년대에는 시험과 입시에 몰입해야 했고 90년대 초반 대학에 입학했지만 시들해진 민주화 논쟁 가운데 소위 ‘신세대’라고 하는 탈정치 담론이 중심에 섰다. 탈냉전 이후 닥친 세계화 물결의 첫 세대였지만 대학 졸업을 앞둔 1997년 닥친 외환위기로 인해 ‘국가 없는 시장’에서 생존해야 하는 경쟁에 내몰렸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세대는 한국의 근대화시기에 대한 인식과 신념도 불명확했지만, 변화하는 사회와 미래에 대한 준비도 충분하지 못했다.

학문의 변화도 사회적 변화만큼이나 컸다. 정보통신 혁명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의 장벽이 축소되면서 공간적 조건이 학문의 질을 결정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인터넷 공간은 학문에 필요한 서적과 자료,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험의 한계마저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계질서가 다원화되면서 일부 강대국 중심의 인식도 변화됐다. 한국은 혁신적 선도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선점하면서 경쟁국가로 등장하고 있다.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룬 한국의 대외관계가 확대되면서 더 이상 미국과 일본에 일방적 의존이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발전 이후 우리의 문제에 대한 질문과 인식이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독 학문 영역의 변화는 느리다. 한국의 경제적 발전 수준에 비해 학문적 경쟁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학문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국가 주도의 정책과 투자가 이어지고 있지만 학문의 위기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영어권에 편중된 유학열풍이 점점 더 가열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학문의 위기를 대변하는 것이다. 국내 많은 장학재단이 여전히 해외유학을 지원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국내 박사과정에 대한 지원이나 현지연구를 위한 지원은 미치지 못한다. 학문적 성과가 기업의 경쟁력이나 문화적 한류를 선도해야 하는데 한국 사회는 오히려 역설적 불균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는 복합적 사회문제의 결과인 만큼 재단하기 힘들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현상과 인식의 격차다. ‘세계화’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돼 왔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세계화는 외향적 세계화(Out-bound Globalization)일뿐 내향적 세계화(in-bound globalization)는 경시됐다. 그래서 추격과 경쟁을 위한 학습은 여전히 한국의 학문을 지배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이 창의적 성과를 낳을 수 있다는 근대적 대학교육이 최근 카이스트의 발전 이후 세대를 죽음으로 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발전 이후 한국에 대한 자성과 성찰은 부족하다. 서구의 인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현상이 있음에도 학문은 근대적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인식의 관성일지도 모른다.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히 학문의 여건은 변했다. 학교의 지원을 받아 영국, 일본, 대만에서 개최된 학술회의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포스코 청암재단으로부터 현지 연구비를 지원받아 일본 게이오대와 대만 국립정치대에 방문연구원으로 체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학문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라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발전 이후 세대에게 학문은 우리 안의 것과 우리 밖의 것의 소통의 과정이다. ‘서구’이어야만 했던 근대화 세대와는 달리 공간과 시간으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사회적 편견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발전 이후 세대는 현상과 인식의 새로운 균형을 위해 정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사회 전반의 인식의 전환과 지원을 기대한다.

윤대엽 연세대ㆍ정치학
연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발전 이후 수출 주도 발전의 新정치: 한국, 일본, 대만 비교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10년 한국연구재단 주최 제1회 창의연구논문상(사회부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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